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이 시대의 희망은 진정한 복음에 근거한 종교개혁

그 이상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노병기 목사 칼럼
전체글 보기
회원 글쓰기
역사적 정통교회 신학
종교개혁
칼뱅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존 오웬
대각성 운동
조지 윗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대각성 조직신학
구원론
새생활론
선택론
현대교회 영분별
형식주의
은사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
로마 가톨릭
역사적 신앙고백서

24 , 1
최용환    2019-04-20 13:18:19   
http://blog.daum.net/godlysalvation/?t__nil_login=myblog
선한 목자 1  

 이 설교를 읽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하다. 조지 휫필드 마지막이 될 설교여행에 앞서 영국에 있던 성도에게 고별설교를 하고 있다. ‘선한 목자’, 설교제목을 이렇게 정한 이유도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설교임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양에게 꼴을 먹였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 서기관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 것처럼 휫필드는 영국 국교회에서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으나 이후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그가 처음 아메리카를 갔다가 영국에 돌아왔을 때 교회는 휫필드에게 단 한 곳에 강단을 내어주지 않았다.

허나 휫필드는 조금도 낙망하지 않고 교회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밖에서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야외에서 설교하였다(야외 설교 사역은 이후 조지 웨슬리가 계승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일반 백성들은 이 선한 목자의 후손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고 듭나 새사람이 되었다. 

내 귀에 지금도 필드의 외침이 생생히 들리는 듯 하다."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위해 사람들 앞에서 고통을 받는 사역 외에는 바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택자를 향해 주님께 마지막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했다."주여, 저를 지켜주소서. 주님의 손에서 그들이 우리 중 어느 하나라도 빼앗지 못하게 하소서."

아멘! 이것이 진정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목자의 외침이다. 시대를 본다. 그 누구도 휫필드와 같이 칭의와 거듭남의 복음을 전하는 목자가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 주님의 택한 어린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 구해낼 진정한 목자가 있는가! '주여, 이 마지막 시대에 조지 휫필도와 같은 선한 목자를 세워주시어 복음을 기다리는 택자를 구원하여 주소서' 


그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로이드 존스는 윗필드에 대하여 “그 세기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 중애 윗필드가 가장 사랑한 말한 사람”이며 “영국이 지금까지 배출한 설교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하였다.

『설교의 역사』를 쓴 다간은 “사도들 이후 설교의 역사에서 조지 윗필드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이름은 없다”라고 했다.

존 웨슬리의 전기를 쓴 배질 밀러는 “설교자로서 바울 이후 윗필드보다 더 큰 명성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18세기의 영적 지도자에서 존 라일은 “내가 제일 먼저 거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유명한 조지 윗필드다. 그의 출생 연도를 고려한다면 순서상 첫 번째는 될 수 없지만,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를 공적의 순서에서 첫 번째 자리에 놓고자 한다. 백 년 전 모든 영적인 거장 중에서 윗필드만큼 시대의 요구를 빨리 파악한 인물은 없었으며, 영적인 전쟁의 위대한 사역에서 윗필드만큼 앞장서 나간 사람도 없었다. 만일 내가 윗필드 앞에 다른 이름을 놓는다면 그것은 내가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선한 목자


조지 윗필드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7-28).


제가 믿고 있는 바도 그렇거니와 일반적으로도 나쁜 행위들은 좋은 법을 탄생시키기 마련입니다. 이 법칙을 이 세상 모든 일들과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 법칙과 관련시킬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쁜 행위들이나 불건전함, 듣기 거북한 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글어 들어 결국 하나님이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나온 가장 멋있는 설교들의 재료가 된 예가 많습니다.


혹자는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능력을 지니고 오셨으므로, 신성한 권위를 지니신 까닭에 그분이 말씀하시면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서서 입을 열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지혜를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혹은 당대의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에 압도되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인정하는 데 모두 흔쾌히 동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좀체 설교를 하기가 힘들 정도였고 그들은 늘 이것저것 트집을 잡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종종 그들은 예수님이 설교하시면 중간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이 적의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그들의 손에 넘겨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실 때 나타났던 그들의 증오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 장을 있는 그대로 읽노라면,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로 자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되돌려 받은 반응은 고작 마귀들렸다는 비난이나 미친 사람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뿐이었습니다. 이러한 말들로 인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그들 가운데는 “그는 마귀들리고 미쳤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그의 말을 듣느냐?”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집의 주인이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그 종들은 무얼 기대하겠습니까? 조금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말은 마귀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요 10:21). 정말이지 마귀들린 자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설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요 10:21).


주님은 밑바닥 인생들과도 교분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지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역을 착실히 수행해 나가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을 닮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좋은 날과 나쁜 날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견디어 나갈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해 뭐라고 짖어대는 자들로 인하여 한 순간이라도 사역을 멈출 만큼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마귀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때 예루살렘은 수전절을 지내고 있었고, 계절은 겨울이었습니다. 이 절기는 아마 7일에서 8일정도 지속되었을 것입니다. 수전절은 안티오쿠스(Antiochus)로 인하여 더럽혀진 성전과 제단을 다시 복구한 날을 기념하여 제정된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절기는 그저 인간이 만든 행사에 불과했습니다. 거룩한 분의 그림자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도 없는 그런 행사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행사를 혹평하는 설교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면 사람들과 복음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교회 의례라든가 행사에 관하여 논쟁하면서 시간을 죽이진 않을 것입니다. 의식이나 행사 따위엔 아예 무관심해질 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행사에 가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거기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그물을 던지시기 위해 그 장소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면 논쟁에 휩싸일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감리교는 칭찬을 받을만합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지난 40년간 우리 감리교 설교자들 중에 비본질적인 부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고 일어선 이가 한명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최상의 기회를 만드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요 10: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을 강단에 세우고 온갖 아첨으로 그분이 설교를 하시도록 유도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그분이 회당 사이를 걷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분은 홀로 걸으셨을 것입니다. 따라붙는 사람 하나 없이 말입니다. 그분은 성전을 거니시며 또 여기저기를 둘러보시다가, 성전이 어떻게 훼파되어갈 것인지를 마음에 떠올리고 계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생각에 잠겨 그 땅에 임할 끔찍한 재앙을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재앙의 날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24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유대인들이 와서 주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고 하니” 그들은 주님이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신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주님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저자를 잡자. 잡아서 한번 싸움을 걸어보자." 시편에는 그들의 행태를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들이 벌떼와 같이 나를 에워쌌어도...”(시 118:12). 그들은 속으로 말합니다. '그를 우리 가운데로 끌고 와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우리가 그 자를 억누를 수 있는 지 한번 시험해 보자.'


그들은 주님께로 다가와 말을 던집니다.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요 10:24). 그럴듯하게 들리는 질문입니다. "얼마나 물어댔는데, 언제까지 우리를 의구심 가운데 내버려둘 생각이시오?" 어떤 이들은 그 말에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즉, "언제까지 우리의 살며시 훔치는 짓을 계속할 겁니까?"


그들은 그분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을 메시야로 내세우려는, 압살롬처럼 뱃속이 검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인간들은 늘 선한 사람들의 행동을 곡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의심에 빠져들게 한 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아닙니다, 그들의 책임입니다.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 '선생이여, 더 이상 비유로 말씀하시지 마시고 조금만 더 명확히 말씀해 주시오. 우리에게 그대가 누구신지를 밝혀 주시오, 당신 입으로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시오.'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게게 분명히 말하라...”(요 10:24). 그들은 그분을 책잡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분이 자신에 관하여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들은 그 말을 근거로 그분을 비난했을 것이고, 만일 그분이 자신에 관하여 그리스도라고 밝히셨다면 그들은 또 그 말을 듣고 당장 로마 관원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로마의 위정자들은 메시야를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메시야란 로마 황제를 권좌에서 몰아내려드는 불손한 자에 불과했습니다. 마귀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자들인 그들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정부에 반역을 꾀하여 한다는 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주 심어줍니다.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게게 분명히 말하라...” 주님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곧장 대답하십니다. 조금도 숨기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되”(요 10:25).

 

만일 그분이 명백히 "나는 메시야다"라고 하셨다면 그들은 당장 주님을 붙잡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셨습니다. 비둘기 같이 순수한 분께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말씀을 듣고서도 그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눈치체지 못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요 10:26). 그들의 불신은 주님께 더없는 슬픔의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7-28).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느니라.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하는 일들을 보고 너희가 분노하지만, 그것은 너희들의 생각이 그릇된 까닭이니라.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의 스토다드Stoddard는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아주 훌륭한 설교를 했습니다. 흔하지 않은 설교 본문이고, 또 회중을 각성시키는 데 그 본문이 쓰인 적인 전무하다시피 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설교를 축복해 주셨고, 300명의 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의 신실한 사역 태도를 보시고 그런 각성이 일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침례 교도와 조합 교회파, 혹은 감리교도와 장로교회로 나누는 구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양과 염소의 무리로 나누셨습니다. 오늘 이 참에 여러분은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비유되고, 믿지 않는 자들은 늘 나쁘고 별로 볼 게 없는 것들에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혹자는 물을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양으로 불리느냐고. 제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짧지만 마음에 흡족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양은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양떼는 자그마한 가축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양 떼로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서 보기에 작은 자들이고, 또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도 작은 무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 즉, 왕과 군주들이 우리 편이면, 그러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실로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우리 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러면 교회가 더 나아질 것 같습니까? 궁정과 민간 사이에서 감리 교인이 되는 것이 대유행이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소설책 대신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다니겠지요.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결코 양지에서 부흥되는 법이 없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도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전 1:26-27).


양은 흔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짐승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온순한 동물로 평가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한량없는 자비로 우리가 그분의 양임을 알게 하시고, 또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복된 성품을 가득 부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서 배우라...”(마 11:29). 무얼 배우라는 말씀이십니까? 기적을 행하는 법? 아닙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마 11:29). 어느 위대한 믿음의 선배는 말하길, "내가 가장 원하는 성품이 있다는 그것은 바로 온유함입니다. 즉, 나쁜 처우를 참아내고 잊어버리며 용서할 줄 아는 성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상처를 입었음을 자각하는 순간 그 악을 극복한 뿐만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얻기를 나는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온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 온유함은 없어서는 안될 성품입니다. 무자비한 인간은 늘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정자들은 모두 온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가차 없고 용서할 줄 모르는 위정자는 태양의 전차를 이끌고 가는 파에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온 세상을 불태워버렸다는 위인 말입니다.


양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짐승보다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동물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양에 비유되는 것은 너무도 적절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잃어버린 양같이 길을 잃었으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이는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같은 구절을 인용하곤 합니다.


개나 말은 길을 잃어버릴 지라도 곧잘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좀 다릅니다. 지나가는 길손이여 내 갈 길 좀 알려주오, 하기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서 ‘매애’하고 울면서 방황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도 우리를 벗어나 정처 없이 헤매기 일쑤입니다. 선하신 목자의 눈을 피해 이 들판 저 들판, 또 이 골짝 저 골짝을 돌아다니다가 털이 다 빠질 정도로 고생을 한 연후에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양에게 그렇게 못난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땅에 거름을 쏟아놓곤 하는데 이 거름은 땅을 씨앗이 발아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 주며, 또 그 털로는 옷을 만듭니다. 양에게서 나는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저를 양과 닮은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믿음을 전파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저버리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이는 의의 전가라는 교리가 가장 흔하게 부딪히게 되는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상입니다. 염치없는 중상모략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은 늘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입을 수 있을 만큼의 양모를 생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손수 수고하고 일하며,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풍성한 것들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내 양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짤막함에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택함을 받은 양들입니다. 그분은 “내 양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양들은 모두 값을 주고 산 것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아침 이 하찮은 설교자의 고별 설교를 듣기 위해 이 장막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설교하는 자를 잊어버리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은 이 장막보다 어 먼 곳으로 이끌어 가고 싶습니다. 어디로 이끌어 가고 싶냐구요? 바로 갈보리입니다. 갈보리 산으로 여러분을 인도해가고 싶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그 값지고 보배로운 피를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우리를 양자로 택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신 이 거래는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과감히 거래를 성사시키셨습니다. 여러분과 나를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의 날에 우리는 그분께로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양들에 대하여 특별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요 10:4).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 목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목자가 양들을 뒤따라가는 모습이 몇 번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7:8시편 78:71이 그것입니다. 우리 영국에서는 목동이 양 뒤로 따라 갑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좀 다릅니다. 목자들이 양 앞쪽에서 걸어갑니다. 그들은 손에 지팡이를 쥐고서 양들만이 알아듣는 독특한 음성을 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요 10:4). 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는지라”(마 17:5). 성경도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나니 바로 지금이라. 듣는 자들은 살리라”(요 5:25). 자, 이 말씀은 결국 다음의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의 음성을 듣기에 앞서 우리는 모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의 음성 말입니다. 율법은 시온 산이 아니라 시내 산으로 곧장 뻗어있는 길 위에서 선포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자신이 회심한 때를 기억하지 못하겠노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 전 그렇게 믿습니다. 대개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다루신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좀 더 신속히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주님을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율법의 책망을 들었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려면 우선 율법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폭풍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외투를 꽉 잡아서 몸에 단단히 밀착시키려들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율법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패상을 바짝 다가가서 목도하게 만들기 마련입니다(롬 7:7,8,9).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 그들의 혼에 비치면 그들은 그토록 가까이 다가오던 부패상들을 모조리 훌훌 벗어던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들아, 딸들아, 힘을 내라. 너의 죄들이, 그 숱한 죄들이 모두 용서되었느니라."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요 10:3). 이는 그들이 항시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지를 드러냅니다. 악인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생의 자랑에 치중하고, 마귀가 때때로 속삭여대는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도 회심하기 전에는 모두 다 그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로, 구속주의 보혈이 주는 평안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게 됩니다. 즉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증거는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 기쁨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따라 어디든지 간다고 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가 어디를 향하든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을 따릅니다. 옆에 있는 양의 발을 밟기도 하고 서로 부딪히기도 하면서, 천상을 향하여 가는 그 길을 서둘러 따라갑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삶 전체에서 그분의 말과 행동을 닮아가고 또 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도 그분의 뜻을 좇아 가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에게 명하여 물 위로 주께 오라 하소서....”(마 14:28). 그리스도와 무한한 자비를 전파하러 물을 건너가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위대한 목자의 지팡이가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과 생각에 있어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의 본분입니다.


자, 이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우리가 더 오래 산다 할지라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몇 달에 걸쳐 설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한 말씀 드려야겠군요. 여러분들 중 어떤 이들은 오늘 아침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신속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대열로 들어오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 제가 생각하기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속해 있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아주 진지하고 진솔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주님을 따르기 위해 그분의 음성을 듣고 온전히 그분께 자신을 드리고 있으십니까? 저는 믿겠습니다. 떠나야할 마당에 이렇게 믿는 게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 지금 제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이들을 앞에 두고, 즉 그 고귀한 혼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맞다면,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토록 빈약한 열매를 맺어드리고, 너무도 자주 그분을 떠나 방황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양으로 남아 그분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사실입니까? 여러분들 마음속에도 이런 말들이 웅웅거린다면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그분의 우뚝하고 위대하며,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을 송축합시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내가 특별한 혼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저를 통하여 자신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들려 주셨다면, 이 불쌍하고 연약한 죄인은 행복한 나그네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드립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그분은 여러분에게 자신의 음성을 들려 주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시형 아멘! 저는 주님의 양이니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 202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