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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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
최용환    2011-03-28 21: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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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에 대하여  

중생에 대하여(On Regeneration)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 : 17)


중생,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라는 교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교리의 하나이다. 이렇게 중요한 교리를 성경에는 아주 평이하게 그리고 매우 빈번하게 기록되어  “뛰어가는 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중생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결정하는 핵심이고, 각 종파의 모든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동의하는 구원의 요점이지만,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분들이(신학자) 일반적으로 중생을 거의 언급하지도 않고 실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과장이 아니다.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이 중생과 같은 내용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리상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을 믿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한 분의 중재자를 믿고, 인간으로 육화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 말 자체는 사실이다.


자신들을 구원할 이름은 예수님이라는 이름 말고는 하늘 아래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생하지 않았으며 거듭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예수님 보혈의 분깃에 참여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니고데모와 함께 외쳐야 할 처지이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라고 말이다. 아니면 사도 바울이 아테네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경우처럼 대꾸할 처지이다. “이 말더듬는 자가 뭐라고 말하는고? 이 자는 이상한 교리를 세우는 자 같군!” 이라고 말이다. 이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설파하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미력이나마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연합시켜놓은 것을 분리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성화되지 않고, 자신의 본성이 변화되어 거룩하게 되지 않고, 그러고도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이 자신들에게 전가되었다고 헛된 망상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음과 같이 확대하여 해석해 보겠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다.


둘째,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다.


셋째, 바울 사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주장을 덧붙이겠다.


넷째, 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것 이상 추론해 볼 수 있는 내용 몇 가지를 도출해서 언급하고 한두 마디 권면의 말로 결론을 짓겠다.




I.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1. 외적인 공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기독교인이라 불리거나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의미로만 이 구절을 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당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거나 현실의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천부당만부당하다. “물로 태어난” 자가 “성령으로 태어난” 자인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이 사실은 너무나 쉽게 확인되며 분명히 그렇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으로는 전혀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외적 공표 내지 주의 이름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도 했다. “외형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 말을 우리 기독교에 적용하면 명목상 크리스천이 다 참 크리스천은 아니다. 크리스천이기는커녕 그 근처도 못 온다. 우리 주님은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 이름으로 예언하고 설교하고 또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많은 기사를 행하여도 마지막 심판날에 버림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이 불의의 일꾼들아”라고 하실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보다 내밀한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이 당한 고난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외적 공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내적 변화와 마음의 정화를 통해 주님의 성령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즉 참되며 생생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하는 이것은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덕성(virtue)을 받는다. 이는 마치 머리와 우리 몸 각 지체의 관계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말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고 했고, 즉 참된 크리스천을 안다고 할 때처럼 그렇게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고후 12 : 1-3참조). 또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서(빌 3 : 8 - 9)에서 간절히 소망하듯이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기를 원한다고 했다(이 정도 수준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준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분명 이상 살펴본 바대로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할례에 관해 언급한다. 이 주제는 오늘 본문의 주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외적인 크리스천이 참 크리스천이 아니다. 육신에 외적으로 표현되는 세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적이며 세례를 마음으로 받고 단순히 물이 아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는 참된 크리스천이다. 이런 자에 대한 칭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할례든 무할례든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전혀 유용하지 않다.”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선언하는 바는 누구든지 진정으로 그리고 온당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명심하고 이제 두 번째 논의로 가보자.




II.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여기서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 말을 우리가 육체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마치 원시적인 어떤 보잘것없는 존재로 돌아가 재창조되어 형태를 이루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니고데모가 무지하게도 상상했던 것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의미에 어떤 유익이 되겠는가?



“육체로 난 자는 여전히 육체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늘 그랬듯 세속적인 인간으로 남게 된다. 세속적인 부모로부터 나와 결과적으로 모든 죄악과 부패의 씨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간단히 말해 육적인 상태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어 정신적 품성과 기질을 함양해야 하고, 옛 사람의 방식을 전적으로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금광석 한 덩어리가 있다고 했을 때 이 금광석을 가공하여 다듬으면 전혀 다른 금으로 변하게 된다. 또 쓰레기 더미에 덮여 있는 빛나는 유리를 예로 말하면 이 유리를 닦아 투명하고 깨끗하게 만들면 이 유리는 새 유리가 된다. 문둥병에서 나은 나만의 경우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문둥병 환자의 살은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고, 이 자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 영혼도 야만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 성령의 축복된 영향을 받아 온갖 더러운 것과 쓰레기와 문둥병에서 정화되고 깨끗하게 된다. 이 사람이 새로워졌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III. 이런 영광스러운 변화가 우리 심령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자신 말고는 아무도 성령의 주권적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에 반박하는 주장 자체가 필요 없다.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바로 성령에 관해 물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그리고 우리는 자연 현상에 관해 들었을 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보통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문제의 진리를 정리해 보자. 중생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말하는 이 교리를 자연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있으며, 우리 각자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주장한 것이다. 중생의 문제에 대해 보다 상세히 언급하겠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확증할 정도의 논의는 될 것이다.


1. 하나님 자신이 성경에서 이 점을 말했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된 구절들 상당히 많이 뽑을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그래서 율법의 영적 의미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니고데모가 중생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진다.



니고데모는 중생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 라고 우리의 복된 주님께 묻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제 안에서 온전한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나님께 너무나 자주 간청했던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들도 다같이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 가지라고 경고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하나님인 주님께 돌이키라고 했다. 구약에 있는 중생의 교리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신약에서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나 평이하게 인용되고 있어 달리는 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선생님 자체이셨던 분(곧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사람(자연적으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주장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지 못하게 하려고, 즉 우리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해 니고데모와 같이 이 교리를 거부하지 않도록 하려고 우리의 복된 주님은 맹세로 이 주장을 확언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이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해 읽어도 된다. “아멘인 나, 진리 자체인 나는 네게 이르노니 이것은 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변할 수 없는 약속이니, 곧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가 된다. 



이런 부류의 말씀을 사도들의 여러 서신에서 무수히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질 것”을 요청받는다. 이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품성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부패한 옛 사람을 벗고 참된 의와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을 따르도록 창조된 새사람을 옷 입는 것이다.



옛 것은 마땅히 지나가야 하고, 모든 것은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는 “중생이라는 씻음으로, 곧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구원될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 뽑은 말씀을 적절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굳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사도 바울은 확고하게 다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여러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보자. 다시 태어나는 것(중생, 새롭게 태어남)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옷 입는다는 것, 우리 마음의 영이 새롭게 되는 것, 새 피조물이 되는 것,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고 실제적인 마음의 내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앞에서 열거한 표현들이 실제적이지도 않고 확고한 의미도 없는 빈말이고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개중엔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불행하도다. 이들이 이렇게 비유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부러운 일이 아니다. 또 이들이 자신들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게 아니라면 할 말이 없다.



이 구절들 외에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찾아봐도 똑같은 진리를 확증할 뿐이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너무나 평이하고 확실한 내용이라 아무도 그 내용을 부인할 수 없다. “회심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고,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며, 자기 마음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귀로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도 있다.




2. 하나님은 성결하시고 인간의 현 상태는 부패하고 오염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영으로 묘사되어 있다(지금 이야기는 성경을 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무한히 성스러운 존재로 “너무나 순결한 눈을 지니셨기 때문에 불의를 볼 수 없다.” 정말 초월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다. 그래서 “천국조차도 하나님 눈에는 깨끗하지 않으며 천사들조차도 흠이 있어 보인다.” 한편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잉태되고 태어난” 피조물로 묘사되어 있다(모든 중생한 사람은 이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알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조금의 선한 것도 거하지 않는다.” “세속적이고 죄악 가운데 팔린 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에 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히 합치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더럽고 부패하고 오염되어 곤고한 자인 인간이 변화하여 어느 정도나마 하나님같이 되기 전에 어떻게 무한히 성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불의를 볼 수 없는 성결한 눈을 가진 하나님이 불의와 거할 수 있는가? 천국마저도 깨끗하지 않게 여기시는 분이 불결함 자체와 함께 거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빛이 어둠과 교통하고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합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고려해 보자.


천국을 세부적으로 특별하게 묘사하기란 헛되고 주제넘은 짓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수님의 신실한 추씬湄涌“?예비된 것들은 인간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의 천국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서 누릴 것조차 인간들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윤곽을 그려보겠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닦아놓은 행복도 영적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세속적 마음이 변하여 영적으로 되지 않는다면 빛 속에 있는 성도들이 향유할 유업에 절대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패역한 자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의 모든 탐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교도들이 생각하는 천국에서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최대로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직 영적인 관계로 깨끗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이 축복된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의 향취를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총체적으로 혁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전능한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거룩함이 없이는 (중생으로 성결하게 되고 그럼으로 심령에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모습을 갖게 되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룩한 주님께서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shall not이 아니라 cannot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모든 이치를 보더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누리려고 할 때 거기에 합당하게 우리 기질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면 우리가 어떤 편안함이나 만족함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음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귀머거리에게 들려준들 무슨 기쁨을 누리겠으며, 가장 뛰어난 그림을 소경에게 보여준들 무슨 즐거움을 얻겠는가? 미각을 잃은 사람이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겠는가? 또 더러운 돼지가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에서 기뻐할 줄 알겠는가? 그럴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어진 즐거움을 감지할 수 있는 합당한 마음의 기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심령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죽음으로 심령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더 깊은 차원의 즐거움이나 고통을 감지하는 능력이 확대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함께 그 즐거움이 표출될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이 즐거웠다면 거룩한 천사들과 교통하고 사귀는 것은 더욱 무한히 즐거울 것이다. 천국에서 인간의 영은 완전해진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상태라면 우리의 영혼은 전혀 행복할 수 없을 것임을 우리 자신이 잘 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축복받은 자의 영역으로 그런 자를 허락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네 번째 논점을 말해야겠다.


4.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첫 번째이자 주된 목적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죄값으로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구주의 죽음으로 단지 우리 죄 사함만을 받은 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크게 기뻐할 이유는 별로 없는 셈이다. 저주받은 불쌍한 죄인인 우리는 숙명적인 질병으로 멸망하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구주의 죽음으로 그의 심판에서 용서함을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자로서 복락에 이르기에 법적 장애가 있다는 것은 물론 본성상 도덕적 불순함 때문에 어떤 강력한 변화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까지 (이미 앞에서 입증되었듯이) 천국을 향유할 수 없음을 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온전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구주께서 자신의 보혈로 산 복락을 우리가 향유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며,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덮씌우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성화하고 정화하며 깨끗이 하고 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고 하였다. 




IV. 그럼 오늘 본문 말씀에서 더 추론할 수 있는 것 몇 가지만 더 언급하겠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마음속에 어떤 실제적인 내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외적인 종교적 의무만 그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책망의 말씀으로 적용해도 되겠다.


우리 주변에 공적이든 사적이든 정규적인 기도 모임에 정확히 시간을 지켜 참석하고 성찬식을 받을 때도 그러하며 때때로 금식을 하는 등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종교적 제도에 순응하면서 종교적 방법에 단지 안주할 뿐이며 이것으로 다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정확한 사실을 안다면 모든 제도화된 방법들, 예를 들어 은혜의 수단들 곧 기도, 금식,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기, 성찬을 받는 것 등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내적으로 더 나아져야 하는 것이다. 심령 속에 영적 생명이 옮겨져야 한다.



종교적 의식은 수단일 뿐이요, 종교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일 뿐이다. 바리새인보다 더 종교적인 자들이 누가 있는가?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자기가 소유한 전부의 십일조를 냈다. 하지만 우리 구주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듯이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지 않았다.



어쩌면 당신도 바리새인과 같이 자주 금식하고 오래 기도하고, 헤롯과 함께 기쁘게 좋은 설교를 듣는 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헛되고 하찮은 것에 집착하고 부도덕하거나 세속적인 마음이라면 그저 간신히 교회나 오가고 외적 의식이나 지키는데 급급한 사람들과 좀 다르다고 해서 당신이 그런 사람들보다 뭐가 더 나은가? 오히려 당신이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쁘다. 당신이 거룩한 종교적 수단을 이용하고 남용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별개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당신이 그들보다 더 큰 아니 최대의 저주를 받게 된다.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형식적 종교 활동에 열심인 자와 다른 어떤 부류의 집단을 분별하는데 유용하다. 사람들 중에는 근거도 없는 가정에 기초하여 약간의 도덕적 덕목을 잘 지키는데 안주하여 자신이 훌륭한 크리스천이라고 거짓 상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사업적 거래를 공평하게 하고, 식사에 절제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왜 옛 이교도들은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는가? 이들은 선량한 도덕적 미덕을 지키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뛰어났는데도 말이다. 또 성 바울이 개심하기 전에 모든 선한 양심에 따라 살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바울은 그런 인간적 본성의 일에 의존하는 모든 것을 비난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바라고 부활의 권능을 알고, 성령의 받았다는 경험적 증거를 갖기를 바랐다. 그 성령은 주님의 죽음으로 사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바울 자신에게 획득되고 적용되었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자. 은총에는 이성적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에는 당연히 도덕성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도덕주의자라면, 즉 성령의 강력한 작용으로 내적으로 이루어진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어떤 새로운 본성의 원칙에서 나와야 한다. 내적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심판날에 벌거벗은 자로 나설 수밖에 없다. 즉 심판의 현장에서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은 자의 무리에 속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의 옷을 입지 못했으니 당연히 자신의 심령에 거룩함이 충만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복락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3. 부분적인 변화만으로 안주하는 사람, 즉 철저하고 실제적이며, 내적인 마음의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좀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세상과 조금만 친해도 세상적인 특징들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과거에는 내놓고 세속적이던 사람이 자신의 악행의 결과를 보고, 또 그로 인해 세속적으로도 많은 좋지 않은 일들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알고 말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교양있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도 않지만) 그래서 자신들이 매우 종교적이라고 뻐긴다. 왜냐하면 과거의 자기들 모습과는 조금이나마 다르고 한때 드러내놓고 사악했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숨겨진 애착의 범죄 등을 지니고 있게 될 것이며 몇 가지 집착하는 세속적인 모습이 있어 이것과 완전히 결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죽이지 못한 어떤 숨겨진 탐욕, 애써 뿌리 뽑지 못한 어떤 못된 습관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허탄한 인간아 알고나 있느냐. 당신이 누구든 하나님 우리 주께서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철저하고 건전한 회심이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당신은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속된 것에서 교양있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 당신은 문화적인 것에서 거룩함으로 돌이켜야 한다. 당신의 심령 안에서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단 하나만 부족해도 당신에게 유익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 당신은 거의(almost)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완전히(altogether)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신은 크리스천이라고 자랑해봐야 헛짓거리이다.


4.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규정이라 하겠다. 교파와 나이와 기타 그 사람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학위나 자질 등에 관계없이 말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유일하게 확고한 구원의 기초이다. 이 기초 위에 죄 사함과 평안과 행복의 굳건한 토대를 확고하게 세울 수 있다.



우리는 외적인 공표라는 부러진 갈대(믿을 수 없는 것)에 참으로 의존하려 한다. 우리는 이교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 마시지 않고 정직하며 도덕적인 삶을 사는 한 그 정도면 충분히 선량하다고 생각한다. 공적인 종교 집회에 참석하고 골방에서 꾸준히 기도하는 것으로 안전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지 않고, 오로지 거룩한 은총의 무수한 표출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 또 반복하여 말하면 당신은 기독교와 아무 관계가 없다.



자 우리 모두 심각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 마음속에 던져 보자.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가, 아닌가? 지금 현재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적어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일상적으로 노력하고 있는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쉬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 금식하고 깨어 기도하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게으르게 굴지 않고 수고하여 애써 노력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 들어서 있다. 좋은 씨앗이 우리 마음밭에 뿌려져 정규적이고 지속적인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적절하게 물과 영양을 공급받으면 영생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성령에 관한 말씀을 듣기만 하고 경험적으로 그 말씀을 알지 못하면, 전혀 금식하지도 깨어 기도하지도 않고 모든 영적 헌신을 하지 않으면, 즉 그 길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 한 번 돌이켜 살펴보지도 않고 많은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도 넓은 길로 행하는 것에 만족하게 되면,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방인이요, 세속적 마음과 감각적 쾌락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적하는 자가 된다.



이렇게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게 껍데기 이름뿐이요 벌거벗은 형식적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지경이라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죄짐 아래 있는 것이요, 참되고 철저한 회심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낙망하지 말지어다. 구원 길을 내가 말하고 있다. 내 이야기를 신실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절대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이 여기 당신 안에 거하지 않으면 썩어질 당신 육체는 내세에서도 성령과 함께 거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진지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노니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대로 (구원에) 확실한 것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참된 크리스cjs으로 살기 바란다. “옛사람과 관련된 대화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어라. 새사람은 의로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쫓아 된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일이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수많은 심령들이 거룩한 권능으로 도움을 받았다. 왜 우리가 성공하지 못해 절망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할 수 없는가? 우리 선조들의 하나님이 또 그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지 않은가?


그렇다. 의심할 바 없이 그 후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단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된다. 탐욕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세상 친구들과도 관계를 끊게 되기도 하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열정을 죽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지나치게 귀히 여기기 쉬우며 거기서 떠나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오른손을 자르거나 오른쪽 눈을 뽑아버fu야 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지체, 즉 하나님의 자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되어 지금 받는 고충을 풍성히 보상받게 되지 않는가?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면서 엄청난 일이다. 그 와중에 어쩌면 아니 분명히 생각없는 몇몇 인간으로부터 조롱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자들은 우리가 왜 자기들과 더불어 광란의 일에 몰두하지 않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짓는 성질을 죽이고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으며, 성경에서 명령한 대로 하려고 하고, 천국의 대화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우리의 삶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요, 우리의 끝은 별 볼일 없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도가 되고 영원히 별처럼 빛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조롱과 비방과 비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지 않은가?


철저한 회심에 따르는 보상은 사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이다. 회심의 결과로 하나님의 평안이 반드시 온다. 이 평안은 이 세상에서도 누리게 된다. 이 평안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며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릴 마땅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 평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을 위해 예비한신 자비로운 일들 중 최소한의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연속적으로 전개될 복락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죽음의 날에 회심하지 않고 새롭게 되지 않은 죄인들은 너무나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요, 새로 태어날 우리에겐 새 생명의 첫날인 이 날에 영원한 행복과 안락의 장면이 우리에게 열릴 것이다. 중생하고 다시 태어난 자들은 복음의 모든 영광된 약속들에 실제로 참여할 자격자요, 이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이것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은혜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자기의 귀하고 멸하지 않는 영혼의 구원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앞에 주신 약속과 소망과 영원한 행복을 소유하기 위해 자기 마음속에 참되고 내적인 구원에 이르는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 쉬지 않고 깨어 기도하고 애써 노력할 것이다. 참된 내적 변화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자신이 있음을, 자신이 천국의 유업을 받을 자가 이미 되었음을, 아니 오래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의 실제적 소유자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