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이 시대의 희망은 진정한 복음에 근거한 종교개혁

그 이상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노병기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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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
Noh Byoung-gi    2015-12-01 18: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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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윗필드의 거듭남 체험2  


   내가 믿기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그들보다 더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극단적으로 제어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죽었으며, 기꺼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로 여김을 받고자 했다. 그리함으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들이 외부에서 자신들에 대하여 온갖 악의에 찬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만큼 그들의 속사람이 강성해지는 때가 없었다.”

  윗필드는 스쿠걸이 말한 거듭남을 얻기 위해서 학업에 지장이 올 정도로 극심한 자기 부인과 기도를 계속했다. 윗필드는 거듭남의 은혜를 받기까지 극심한 시련의 기간을 통과하게 된다. 먼저 세인트 메리즈에서 평일에 공적으로 성찬을 받자마자 곧 그를 알았던 모든 상류 학생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한다고 해서 교수의 눈 밖에 나게 되었으며, 종종 꾸짖음을 당했을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면 쫓아내겠다는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가족들도 윗필드의 행동의 변화에 놀랐고 그를 제정신으로 보지 않기까지 했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모욕을 당했다. 어떤 사람은 진흙을 던졌으며, 어떤 사람들은 급료를 가로채기도 했다. 그에게 소중했던 두 친구는 그를 점점 부끄러워하더니 떠나가 버렸다.

  윗필드는 사탄의 직접적 공격도 심하게 받았다. 어느 날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내적인 어둠과 함께 평소와 다른 인상과 무게가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찰스 웨슬리에게 상담을 하였다. 찰스는 자신을 계속 살피라고 조언하면서, 아 켐피스 책의 어떤 한 장을 보라고 했다.

  얼마 안 있어 이 무게가 점점 커져 완전히 그를 내리누르는 것을 느꼈다. 모든 묵상하는 능력, 생각하는 힘까지 빼앗아 갔다. 사탄이 한때 욥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의 육신을 소유하고 그의 몸에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고 윗필드는 확신했다. 모든 묵상의 능력 심지어 생각하는 힘마저 앗아가 버렸다. 기억력도 완전히 떨어졌다. 그의 영혼 전체가 황무해졌으며 메말라 갔다.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을 때마다 영혼과 몸 모두를 짓누르는 엄청난 무게가 느껴졌고, 종종 땀이 날 정도로 그 무게를 견디며 기도해야 했다. 또 쉬려고 누울 때 마귀가 너무나 심하게 괴롭혀 몇 주 동안은 한 번에 세 시간 이상 잠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윗필드는 기도와 자기 부인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감각적인 식욕의 노예였었는지 깨닫고, 과일이나 좋은 음식을 끊고 평소에 먹는 데 썼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차례 금식을 하고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더러운 신을 신었다. 1735년 봄 사순절이 되자 6주간에 걸친 그 절기 내내 토요일 외에는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 동안에는 거친 빵과 설탕을 넣지 않은 세이지 차()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러한 계속적인 금욕과 내적 투쟁으로 말미암아 수난 주간 즈음이 되자 그는 몸이 너무 허약해져 계단을 기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정도가 되었다. 의사는 그에게 침대에 누워만 있을 것을 명령했고 그는 의사의 말대로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때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났다. 다음의 체험은 1735, 그의 나이 21세 때 일어난 일이었다.

     

  병의 증상이 7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방문이었다. 복된 성령께서 이 기간 동안 내내 내 영혼을 정결케 하고 계셨다. 나의 이전의 모든 추하고 악랄했던 죄악들이 내 가슴에 사무치게 떠올랐다. 나는 즉시 그 기억들을 기록했고, 하나님 앞에 아침저녁으로 그것들을 자백했다. 몸은 비록 약했지만, 나는 종종 저녁에 조용한 시간을 두 시간씩 가졌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매번 헬라어 성경과 홀 감독의 가장 탁월한 책 묵상집(Contemplations)을 읽고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7주가 끝나갈 무렵, 열두 달이 넘도록 몸과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압박 아래서 신음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어느 날, 내 입 안에서 심한 목마름과 불쾌한 끈적거림을 느끼고는 갈증을 없애려고 이것저것을 시도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을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실 때 그의 고난이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부르짖었다.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이 일이 있은 즉시 나는 나를 그토록 무겁게 눌렀던 짐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발견하고 느꼈다. 애통의 영이 나를 떠났고, 나는 하나님 내 구주 안에서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동안 내가 어디로 가든지 크게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하나님을 송축하라! 간헐적으로 중단될 때를 제외하고는, 그 후로 그 기쁨은 내 영혼 속에 계속 머물러 더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애통의 날들이 끝났다. 버림받음과 시험의 오랜 밤이 지난 후, 전에 내가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 별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태양이 내 마음에 떠올랐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영혼을 사로잡으셨고, 내가 겸손히 바라기로는,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쳐 주셨다.”

     

  위 글은 1740년에 출간된 일기이고, 1756년에 수정 출간된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탄의 셀 수 없는 공격을 견디고, 여러 달 동안 종의 영 아래서 밤낮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은 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붙잡을 수 있게 하셨다. 그리고 양자의 영을 내게 주심으로 영원한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쳐 주셨다. ! 죄의 무게가 나를 떠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감각과 신앙의 충만한 확신이 나의 외로웠던 영혼 속에 밀려들어 왔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영광으로 충만한 큰 기쁨이 내 영혼을 채웠다. 분명히 이날은 내가 주님과 결혼하는 날이었다. 영원히 기억해야 할 날이었다. 처음에 내 기쁨은 만조와 같았으며, 그리고 마침내 둑을 넘쳐흐르게 되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 큰 소리로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에 이것은 점차 안정되었다. 하나님을 송축할지라! 아주 간헐적인 몇 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후로 계속하여 그 기쁨은 내 영혼 속에 머물렀으며 더욱 커져만 갔다.”

     

  윗필드는 이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은 그가 거듭난 날이며 주님과 결혼하는 날이었다. 55세 때 행한 한 설교(제목: 모든 사람이 가는 곳)에서 윗필드는 미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옥스퍼드를 방문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초로 저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저를 거듭나게 하셨던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온 힘을 다하여 신생을 구한 윗필드에게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영광스러운 신생의 체험을 주셨다. 윗필드의 영적 생애의 특징은 그의 회심 체험의 영구성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한 번도 영적인 확신을 잃거나 영적으로 후퇴하는 일이 없었다.

  윗필드는 22세 되던 1736620일 삼위일체 주일에 글로스터에서 벤슨 감독의 안수로 부제가 되었으며, 7월에 옥스퍼드에서 문학사(B.A.)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윗필드는 설교를 시작하자마자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평일이든 주일이든 그가 설교를 할 때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1737년에는 글로스터, 브리스톨, 런던에서 설교를 하여 성공적인 대중 사역을 하였다(23). 그는 이때에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는 사실에 기초한 새롭고 참된 메서디즘(Methodism)을 일으켰다. 윗필드는 조지아 식민지를 방문해 고아원을 돌보는 일을 도와 달라는 웨슬리의 요청으로 173712월 런던을 떠났다. 배를 타고 17385월 조지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사역했다.

  173812월에 런던으로 돌아온 윗필드는 과거에 자신이 떠났던 그곳에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교회 성직자들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윗필드의 거듭남의 가르침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섰고, 교회들은 그에게 설교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목사는 다시는 윗필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그를 열광주의자나 광신자로 간주했다. 그들은 특히 윗필드가 거듭남과 신생의 교리를 전파하면서, 이는 세례 받은 많은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윗필드가 방문했던 수많은 강단이 빠르게 그에게 등을 돌렸다. …… 아리안주의, 소시니안주의, 이신론 등을 묵인했던 수많은 감독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사역을 완전히 선포하는 한 사람에 대해 적개심을 가득히 품고, 윗필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윗필드는 17392월 브리스톨 부근 킹스우드(Kingswood)에 있는 광부들에게 최초로 야외 설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윗필드는 이제부터는 주변에 큰 공유지가 있는 곳마다, 수많은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마다 목소리를 높여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윗필드가 설교하면 수만 명씩 모여들었다. 무어필즈(Moorfields)의 한 집회에서는 기도 제목이 적힌 종이를 천 장이나 받았다고 전해진다. 거대한 청중의 찬양은 2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예배드리는 장소에 가 보리라고 결코 꿈도 꾸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선포된 복음을 들었으며 간절히 그 말씀을 받았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몇몇 사람을 제외한 대다수 성직자들은 이 이상한 설교자를 전적으로 거절했다. 그들은 진짜 개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 이교도나 마찬가지인 대다수 주민에게 스스로 다가가고자 하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때부터 영국 교회 강단에서 윗필드의 사역은 거의 완전히 중단되었다. …… 분명한 것은 그 당시 영국 국교회가 윗필드와 같은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윗필드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으며, 또한 침묵하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해 약이 올라서 마귀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7번이나 미국을 방문했고, 13회나 대서양을 건넜다. 두 번째 미국 방문 중인 1740년에 미국에서 1차 대각성 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이라는 놀라운 역사가 그를 통하여 일어났다(26). 그는 하루에 두세 번 2만 명의 청중에게 설교할 정도로 역량을 입증했으며, 이러한 생활을 스물두 살부터 생을 마감할 때인 쉰여섯 살까지 지속했다. 윗필드가 설교하러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 보통 수천, 수만 명씩 몰려왔다. 윗필드가 보스턴을 떠나기 전에 행한 한 집회에서는 23천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그날의 인파는 보스턴 전체 인구보다도 많았다고 한다. 그가 가까운 곳에서 설교를 한다는 소문이 들리면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모여들었다. 가게 주인들은 곧장 문을 닫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를 잊었고 농부들은 연장을 놓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서서 설교를 들었고, 비가 오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들으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모였던 일은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조차도 윗필드의 설교 때문에 필라델피아 주민의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신앙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고 무관심한 사람이라 해도 마치 모든 세상이 신앙적으로 변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대각성 운동을 통해 뉴잉글랜드 인구 30만 명 가운데 25만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수많은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고, 다른 성직자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거듭남의 복음을 전했다. 한번은 더블린에서 무지한 가톨릭 폭도에게 거의 죽임을 당할 뻔했다. 윗필드는 불타는 떨기나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시간입니다. 무어필즈(Moorfields)나 케닝턴 커먼에서 썩은 계란이 날아오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개나 고양이를 집어 던지는 순간들, 더러운 오물을 내 옷에 던져서 다 떼어낼 수도 없었던 그런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더 큰 위안의 순간이었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상태에서 저는 안락한 순간들보다 더 많은 위안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엑스터(Exeter)에서 설교를 하던 중에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아서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저를 주시하고 있던 한 노동자를 향해 저의 말이 갑절의 능력으로 다가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