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이 시대의 희망은 진정한 복음에 근거한 종교개혁

그 이상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노병기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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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
최용환    2011-06-11 23: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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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1  

청교도 교회사를 다루고 있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청교도신앙:그 기원과 계승자들』(생명의 말씀사)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 책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웨스터민스터 청교도 연구회’에서 1959-1978년 동안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청교도의 기원과 인물 그리고 청교도 교리와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중요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청교도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그의 해박한 지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교도에서 강조된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의 역사와 성령의 조명과 내주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간절함을 볼 수 있어 나는 큰 도전을 받았다.
이 글에서 소개할 부분은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1964년에 강연한 ‘존 칼빈과 조지 휫필드’이다. 휫필드 목사님을 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바처럼, 칼빈과 휫필드의 관련성을 핍진하게 다룬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존 칼빈은 조지 휫필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지적이다. 칼빈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죽은 정통주의 또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될 수 있는데, 그러한 잘못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지 휫필드의 신앙과 사역을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p.134).
휫필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했지만 또한 성령의 역사와 능력 및 인간의 자유의지와 믿음을 동시에 강조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중생의 필요성, 중생의 성격, 이신칭의, 성령의 직접적 역사와 내적 역사에 대한 설교를 강조했다. 저자는 그의 사역에 성령께서 “빛과 무지개와 우뢰”(p.130)가 동반해주시어 많은 영혼들을 회심으로 구원하였다고 평가한다. 
2천년 조지 휫필드는 사도 바울 이후 최고의 복음전도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매우 겸손하였으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았고 형제의 권면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받아 들였다. 그는 신앙에 있어 진리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자기부인을 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했다. 나는 이러한 면이 휫필드를 최고의 신앙 위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한다.
휫필드는 에드워즈 목사님과 교제하면서 성령의 내적 사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칭의의 교리에 대해서는 웨슬리 형제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가 자신의 신앙체험에만이 전부라고 고집했으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pp.127-129).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광을 믿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일을 하도록 그를 잡아주었던 것입니다. 에드워즈와 다른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서 휫필드와 얘기를 한 일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고록에 나와 있는데,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내적 영향에 대해서 강조한 문제를 가지고 그와 대면하려고 나는 애썼습니다.” 휫필드는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지적인 의미에서 훨씬 더 유능한 사람이었고 훨씬 더 위대한 천재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점에 있어서 불행했습니다. 에드워즈가 기록한 것을 보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것을 휫필드가 사실상 듣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휫필드는 그것을 설교했고 그것을 대단히 강조했습니다.
그는 1737년까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에 대해서 명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의 일기를 읽어보면, 바로 그 진리에 있어서 그를 바로잡아 준 것이 웨슬리 형제들이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휫필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휫필드가 이 면에서 더 균형을 갖추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휫필드가 편당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저도 편당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휫필드로 하여금 설교자의 메시지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가 얼마 중요하며, 그것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도록 도와 준 것은 웨슬리 형제였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그 두 사람을 높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 연합회’의 측면에서 볼 때 저자가 칼빈과 조지 휫필드가 “복음주의자들 간의 연합”을 갈망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허나 그들은 진리 안에서의 연합을 추구했지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pp.110-112).

그들의 공통점 또 하나는-이것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두 사람 다 그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주의자들간의 연합을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 모임에서 우리는 칼빈과 관련시켜 그 연합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칼빈은 모든 개혁자들과 모든 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데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쟁과 차이점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어떤 일이든지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개혁적인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촉진할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 일이 필요하다면 열 바다라도 건널 용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와의 연합이 아니고 개혁적인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말합니다.
조지 휫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웨슬리의 두 형제들과 맞서서 자신의 원리와 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분리를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편당을 없애고 하나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이 끝날 때쯤에는 두 사람이 서로 강단에 서는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휫필드의 요청에 의하여 존 웨슬리가 휫필드의 장례식장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즉 휫필드와 칼빈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인 사람들의 연합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칼빈과 휫필드는 교회를 연합시키는 데 실패했다. 2천 년 교회사의 전성기조차 실패한 교회의 연합! 왜 그랬을까? 첫째는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조차 좌로나 우로나 말씀을 치우쳐서 형통하지 못한 것이다. 신앙위인으로서 훌륭한 점은 우리가 계승해야겠으나 부족한 점은 후손인 우리가 채워야 할 본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

*생각해 볼 문제
-조지 휫필드 목사님의 사역이 단속적이지 않았다면 기독교사는 어땠을까?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 목사님이 연합했다면 기독교사는 어떻게 됐을까?
-18세기에 ‘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가 결성되었다면 기독교사는 어떻게 됐을까?


                                                         -1964-


존 칼빈과 조지 휫필드



방금 발표한 주제를 다루기 전에 사사기 2:8-10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 강연의 제목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제목이 현학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연구회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존 칼빈과 그의 사역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강연을 다섯 차례나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저는 존 칼빈뿐만 아니라 휫필드까지 함께 다를 수 있는 사람인 것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여러분의 생각을 바로 잡기 원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빠져들 수 있는 잘못된 생각에서 여러분을 건져주고도 싶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미 다섯 사람이 존 칼빈에 대해서 말했으니 이제는 존 칼빈에 대해서 말할 것이 없고 조지 휫필드에 대해서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잘못입니다. 존 칼빈과 그의 사역,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풍성한 유산은 너무 크고 방대하기 때문에 존 칼빈이 죽은 지 400년을 맞이하는 이 해의 주제로 계속해 나가는 것이 제게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조지 윗필드에 대해서 말하려는 이유는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올해의 이 모임은 온전히 존 칼빈을 기념하는 일에만 전념하려고 계획했었고, 모임의 형식도 다른 때와 똑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글로스터에 있는 윗필드 기념 교회(장로교)의 목사인 힐튼데이 씨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올해가 휫필드 탄생 250주년임을 지적하면서 그 교회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에게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와서 조지 휫필드에 대해 강연해달라는 청을 했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하필 오늘을 택하였을까요? 그것은 윗필드가 250년 전 오늘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조지 휫필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 특히 글로스터에서 그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이상 큰 특권이 없다는 것과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연구회에 약속이 되어 있어서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정한 날짜를 바꾸는 대단한 친절을 베풀어 주어 그 교회에서 지난 12월 8일에 조지 휫필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제 마음에 즉각적으로, 오늘 저녁에 모이는 이 모임에서 조지 휫필드와 그의 위대하고 영광스런 18세기의 사역을 함께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패커 박사나 다른 이들도 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1964년의 모든 밤 중에서 이 밤을 저 위대하고 능한 사람 조지 윗필드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고 그냥 보내는 것이 아주 잘못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프로그램에 넣는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다른 논문들의 주제는 존 칼빈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휫필드를 끄집어내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충안을 택하여 “존 칼빈과 조지 윗필드”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소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을 함께 놓아야 하는 좋은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많은 면에서 매우 상이합니다. 존 칼빈은 극히 야윈 사람이었고 아주 창백하기조차 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휫필드는 튼튼하고 뚱뚱한 사람이었습니다. 존 칼빈은 전형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었고 윗필드는 대체로 외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연관지어 생각하도록 한 것은 날짜의 우연한 일치 때문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소위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만 해둡시다. 이 말은 그들이 모두 바울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칼빈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세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라면 19세기의 메서디스트들은 두 그룹, 두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것입니다. 조지 윗필드와 존 웨슬리가 그 두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이렇게 크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칼빈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교리에 있어서도 참으로 개혁주의였습니다. 반면에 웨슬리는 알미니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게 윗필드와 칼빈을 연관짓는 것입니다. 윗필드는 웨슬리보다 영국 국교회의 39개조 신앙고백을 더욱 존중했습니다. 그 신앙고백은 칼빈주의적 강조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웨슬리는 거기서 떠났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구별의 주요한 책임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과 휫필드는 그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밤에 패커 박사에게서 존 칼빈의 열심과 그의 방대한 사역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특이한 일입니다. 그 모든 주석들과 기독교강요와 그의 모든 서신들과 소논문들과 그밖에 그가 남긴 모든 것들을 보십시오. 정말 엄청납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정규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그러한 일을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윗필드의 경우도 정확히 그러합니다. 조지 휫필드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큰 열심을 가지고 애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이러한 면에서도 흡사합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둘 다 55세쯤에 인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존 칼빈은 55세에 죽었습니다. 윗필드는 56세에 죽었습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일을 한 두 사람 다 50대 중반에 삶을 마친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 또 하나는-이것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두 사람 다 그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복음주의자들간의 연합을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 모임에서 우리는 칼빈과 관련시켜 그 연합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칼빈은 모든 개혁자들과 모든 복음적인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데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쟁과 차이점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어떤 일이든지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개혁적인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촉진할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 일이 필요하다면 열 바다라도 건널 용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와의 연합이 아니고 개혁적인 복음주의 사람들 사이의 연합을 말합니다.


조지 휫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웨슬리의 두 형제들과 맞서서 자신의 원리와 교리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분리를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러 편당을 없애고 하나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또한 그의 삶이 끝날 때 쯤에는 두 사람이 서로 강단에 서는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윗필드의 요청에 의하여 존 웨슬리가 휫필드의 장례식장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즉 윗필드와 칼빈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인 사람들의 연합에 대하여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 후세의 여러 세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이제 그 문제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당신은 조지 윗필드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십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 한 가지 대답은, 이 연구회 회장께서 바로 지적하셨듯이 그는 글로스터의 가장 위대한 아들이었습니다. 16세기의 존 후퍼 감독이 글로스터의 감독이었으며, 로버트 레이크스도 글로스터 사람이었습니다. 틴데일도 바로 그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패커 박사의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조지 윗필드라고 한 말을 듣고 저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밤 이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의문의 여지 없이 그가 “잉글랜드”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잉글랜드” 설교자라고 강조한 표현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2백 여전인 그 시대에 라일 감독마저 윗필드에 필적한다고 인정하고 시인해야 했던 한 사람이 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다니엘 로랜드(Daniel Rowland)입니다. 그는 그 당신인 18세기에 웨일즈에 살면서 사역했습니다. 그러자 조지 윗필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는 데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확합시다. 여러분이 그렇게 말하고 또 로랜드를 윗필드와 함께 놓는다면, 두 사람이 아마 사도 시대 이후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고 말하는 데 대한 아주 좋은 근거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라일 감독이 동의하듯이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휫필드가 잉글랜드 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역사에 미친 그의 심대한 영향력 때문에 그를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패커 박사는 어제 밤에 존 칼빈의 그러한 측면을 말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윗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글랜드와 웨일즈와 스코클랜드와 미국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헤아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역사가 렉키는 1789년 이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으로부터 이 나를 구한 것은 분명 복음의 대각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조지 휫필드야말로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잉 이러나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요 위대한 설교자인 윗필드를 다시 음미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휫필드에 대해서 잠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놀랍게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조지 윗필드에 대하여 글을 쓰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자못 흥미롭습니다. 여러분이 말할 것이 얼마나 됩니까? 그는 교회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소홀히 취급당한 사람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무지는 섬뜩할 정도입니다. 누구나 책을 읽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 점을 부단하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200여 년 전의 위대한 각성과 부흥에 대하여 말할 때 “웨슬리의 부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예 상례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존 웨슬리가 행한 일로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18세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모두 존 웨슬리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프레드릭 길이 쓴 찰스 웨슬리에 대한 새로운 책에서 그러한 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찰스 웨슬리, 최초의 메소디스트(우리나라에서는 메소디스트라면 무조건 우리 나라식의 감리교를 연상하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한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감기교회는 주로 알미니안적인 신학에 바탕을 둔 감기교회이지만 사실 메소디스트는 알미니안 메소디스트와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로 구분하여야 한다. 메소디스트를 감리교회로 번역한 것은 교회 정치 형태로 교회를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우리 나라식의 교회명이나 사실 메소디스트는 교회정치 형태보다는 신앙적 형태에 주안점을 두고 붙인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메소디스트가 나오면 감리교회라고 하지 않고 그냥 여어를 음역해 놓겠다-역자주)입니다. 그 책에는 윗필드가 평가절하되고 있는가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들어 있습니다. 선택이나 예정에 대하여 야기된 의견의 차이를 둘 사이의 결별 문제로 다루면서 찰스 웨슬리에 대하여 “그는 슬픔을 머금고 옥스퍼드 시절 전도하여 회심케 한 자를 떠나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윗필드를 보고 찰스 웨슬리가 전도하여 회심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은 윗필드를 망각하거나 평가절하하곤 했던 것입니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저명한 메소디스트들이 이 점을 인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저는 기쁩니다. 최근에 어니스트 래튼버리 박사는 메소디즘은 윗필드에 대해 바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현재 메소디스트 역사가 중 한 사람인 스케빙톤 우드 박사도 그러한 말을 기꺼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휫필드가 이처럼 무시되어 온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존 웨슬리에 대해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저는 사람들이 웨슬리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얼마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휫필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해명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사사기 2장 말씀을 읽은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여러분 거기서 강조되는 점을 아실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을 뿐 아니라 “그 세대 사람들도 다 열조로 돌아갔다”라는 말은 여호수아 당대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다음에 우리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제가 볼 때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현대 상태를 이해하는데 큰 빛을 비추어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알지 못할 때 그들은 곧장 교회사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일단 주님을 아는 지식을 상실하게 되면 주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관심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지난 100년 동안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언제나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자극합니다. 오늘 밤을 새우면서 교회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1873년 무디가 이 나를 처음 방문하고 나서 이 나라의 복음주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여기는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잘못이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오랜 기독교회사 기간 중 알려지고 기록된 모든 주님의 역사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매우 신중하게 살펴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두 사실은 불가분의 관계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리면, 주의 종들과 그들을 통하여 행하신 주의 위대한 일들을 아는 지식을 함께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적당한 때에 그러한 전제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


그러나 사람들이 휫필드에 대하여 그렇게 무지한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그이 겸손 때문입니다. 그는 칼빈같이 가장 겸비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는 한 조지 윗필드의 이름은 잊혀지고 지워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여기 모인 분들을 위하여 신학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존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존 웨슬리가 신봉한 알미니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보다 떠벌이는 일에 소극적이라는 생각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여 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의 시설을 종교지들과 논문들에 집중하여 암시적인 말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요청하는 바입니다. 존 칼빈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사람을 겸비하게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는 보잘것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또 사람이 아무리 많은 특권이 있으며 아무리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행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바로 그것이 칼빈이 관심있게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강조점과 교훈에도 이러한 것이 해당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존 웨슬리에 대하여 아는 것만큼 조지 윗필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윗필드가 그렇게 무시당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설명은, 그가 교단을 세우거나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새잉 끝나갈 무렵 이 점에 있어서 잘못이 있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존 웨슬리가 자기보다 더 지혜로웠다고 말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는 “자기 양을 우리 안에 넣었는데” 자기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교단을 만들거나 후세에 교단을 남기는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신앙적인 무리를 살지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단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교단을 남겼고 자기 특유의 신학관을 가진 교단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 존 웨슬리에 대한 책들이 쉬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휫필드의 경우에는 그렇게 할 만한 교단이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바로 그것이 그가 그렇게 서글프게 잊혀지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 사람을 다시 회상해 내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들과 신앙인들 앞에 이 사람을 추켜세웁니까? 저의 대답은 기독교 교회의 오랜 역사 중 가장 놀라운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18세기 신앙 부흥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건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 사건들 중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놀라운 사건일 것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근거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면, 다음과 같이 그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복음적인 각성과 부흥 이전의 이 나라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한심스러웠습니다. 시간이 없으므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이름은 <웨슬리 전후의 영국England Before And Wesley>입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합니까? 물론 그 책은 웨슬리안 메소디스트에 의하여 쓰여졌습니다. 웨슬리만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유도하고 있는 사실들은 진실입니다. 그는 그러한 의미에서 훌륭한 역사가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미숙한 신학자요, 진정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데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훌륭한 사실 수집가였습니다. 웨슬리 브레디가 쓴 그 책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나라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 국교회는 죽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엉망으로 얽힌 삶과 술 취함 여우 사냥 등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주 그렇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단들도 그리 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 측면에서 조금 낫기는 했지만 이 당시의 장로교회들은 아리우스주의 이단에 빠져 있었고 급기야는 아주 사라져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비국교도들의 집단들도 무기력의 상태에 빠져 죽은 정통을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조류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노력했습니다. 보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강좌를 개설했고, 버틀러 감독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유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다음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전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국면에서 영국의 국교도는 소생하게 되었고 비국교도도 소생했고, 메소티스트 공회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단체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더 넓은 영역에서 반동적인 여러 가지의 변화가 대단히 놀랍게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상황이 자주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는 이 나라의 노동조합 운동도 부흥의 간접적인 결과로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입증될 수 있습니다. 전에는 무지하고 술 취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변화되어 거듭나게 되자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되어 교육과 보다 더 나은 노동조건 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 운동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윌리엄 윌버포스에 의하여 주도된 노예 제도 폐지운동이 부흥과 관계됨을 압니다. 그는 이 부흥회의 결과로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이러한 위대한 복음적 각성이 없었다면 1832년의 선거법 개정 법령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복음적 각성에 의하여 깊이 변화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조지 윗필드가 그 복음적 각성 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제일인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무시되고 그에 비하여 존 웨슬리는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은 정말 염치없는 일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다만 공정과 정직과 진실을 말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논쟁을 벌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윗필드를 무시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고 한심한 것은 그러한 점에서입니다. 그것은 다음 모든 경우에 있어서 조지 윗필드가 선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가 가장 먼저 회심했습니다. 제가 앞에서 인용한 책의 저자는 윗필드를 ‘찰스 웨슬리가 옥스퍼드 시절 회심시킨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휫필드가 회심한 것은 1735년이고, 찰스 웨슬리는 1735년에야 회심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말 뜻은 윗필드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이미 찰스 웨슬리와 다른 몇몇의 사람들이 이미 홀리 클럽을 시작한 뒤였으며, 윗필드는 그 모임에 초청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그것이 그의 회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 내에서 그들 중 첫 번째로 회심한 사람은 조지 윗필드로서 그 해가 1735년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하웰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가 웨일즈에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윗필드가 가장 먼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부흥 방법으로 참된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한 사람은 윗필드였습니다. 윗필드는 1736년에 처음 이러한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사역 중에서 가장 위대한 해 가운데 하나가 1737년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웨슬리 형제들이 복음적인 의미에서 설교를 시작한 것은 1738년 5월 이었습니다. 그래서 윗필드는 그러한 면에서도 그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이었습니다. 1737년 그는 런던시에서도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를 했으며 그 결과 엄청난 열매가 따라왔습니다.



 그때 일어난 부흥의 특징 하나가 옥외설교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옥외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교했는데, 그 수가 종종 이천 명을 넘었습니다. 옥외 설교의 효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항상 답은 간단합니다-윗필드입니다. 그는 옥외 설교의 선두 주자였으며 존과 찰스 웨슬리를 설득시켜 그렇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 두 형제는 휫필드보다 훨씬 보수적이었습니다. 윗필드는 이들보다 몇 개월 먼저 이 일을 시작하고 그들도 따르게 하려고 많은 힘을 썼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영역에서 지도자요, 개척자요, 선두였습니다.


그는 단체-종교 단체-결성 면에서 첫째였습니다. 자선 사업에 있어서도 첫째였습니다. 킹스우드 스쿨이라 불리는 유명한 메서디스트 학교가 있는데 수많은 메소디스트 사역자들이 자녀들을 그 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학교는 본래 광부들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이 킹스우드 스쿨을 누가 설립했는지 아십니까? 조지 윗필드입니다. 선도자는 항상 조지 윗필드였습니다. 그는 지도자였습니다. 이 사람을 무시하는 일에 대한 저의 항변은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음을 이제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외에도 그는 웨일즈의 신앙 부흥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현재 웨일즈 장로교회로 알려진 단체의 초대 회장이었습니다. 이것은 흔히 웨일즈 칼빈주의적 메소디스트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윗필드는 1743년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가 회장이 된 것이 이때를 위한 것이었다고 밀습니다. 웨일즈에는 위대한 사람이며 위대한 설교자가 두 사람-다니엘 로랜드와 하웰 해리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 중 누가 초대 회장이 되었느냐였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관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경우만은 한 사람을 택하는 것이 훨씬 유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두 웨일즈인들은 아무도 택하지 않고 잉글랜드 사람을 초대 회장에 앉힘으로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웨일즈인은 이 사람을 장로교 협회 초대 회장으로 여겨 기꺼이 굴복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글래스고의 한 지역인 캠버스랑에서 열리는 그 교제의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제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입니다. 또한 미국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정말 묘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현재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과 저작들을 재출판하는 데 관계하는 포함한 모든 저자들은 1746년 이후 미국에서 휫필드가 끼진 영향은 정말 압도적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면밀하고 정직합니다. 그곳에는 1735년에 처음 일어났던 것보다 더 큰 제 2차적인 “대각성”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들 중 일부가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는 미국을 일곱 차례나 방문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지금도 대서양을 건너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200년 전에 일곱 차례나 건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윗필드는 열 세 번이나 대서양을 횡단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일곱 번째 미국 방문 중에 미국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실상 열세 번 대서양을 횡단한 것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는 열 네 번이나 갔습니다. 그는 설교자로서 34년간 사역하는 동안 18,00회의 설교를 했다고 계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