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이 시대의 희망은 진정한 복음에 근거한 종교개혁

그 이상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노병기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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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1
최용환    2011-04-13 23: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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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론1  

이 명설교는 칭의와 성화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명목상 크리스천들에게 하는 설교이다. 많은 사람들이 칭의에 성화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의롭게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순종이 자신의 순종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죄값을 치루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전혀 거룩함이 없는 생활을 하며 예수님을 믿기 전에처럼 죄를 짓고 산다. 그리고는 ‘육신이 나약해서 이 죄도 짓고, 저 죄도 지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매주, 아니 매일 기도 한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를 짓는다. 이게 무슨 뜻일까? 즉, 그들은 죄를 짓고 회개하고. 죄를 짓고 회개한다. 따라서 이들은 죄를 지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다. 그리고 그 핏값으로 죄를 용서함 받는다. 그러나 또 육신이 나약해서 죄를 짓는다. 그리고는 회개한답시고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계속해서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값을 치루셨다. 즉, 단번에 죄값을 치루셨다(히 7:27; 9:12; 9:26; 9:28; 10:2). 성령님이 누구신가? 하나님 자신이자, 예수님의 영이시다. 즉 성령이 의롭게 된 사람에게 내주하시면, 그 사람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 죄를 이기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성령님은 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임한 사람이 죄를 짓는 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십자가 사건을 잘 묵상해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반복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한다면, 그때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 구약시대 때도 양이나 염소를 통해 죄를 지을 때마다 제물에게 자기의 죄를 전가시키고 그것을 손수 잡아서 각을 뜨고 제사장의 도움을 받아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제사지내는 것을 반복했다. 나중에는 아주 습관처럼 죄를 짓고 제사지내고 죄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즐겨받지 않으셨다(시 51). 그리고 그들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성전 문닫을 자를 찾기까지 하셨다(말 1:10).


예수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이땅에 오셔서 제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오직 한 번이다. 그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사건을 믿어서 죄사함과 의롭게 됨을 체험하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오셔서 거룩하게 해 주신다.


이 칭의와 성화의 과정은 분리할 수가 없다. 물론 구분은 되지만 하나의 사건이다. 루터에 의해 칭의가 제대로 발견됐다. 오시안더가 칭의를 의화로 해석하자, 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칭의’와 ‘성화(중생)’를 구분해 놓았다. 즉 그는 분리한 것이 아니라 구분한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성화의 과정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여기에서 혼돈을 가미시켰다. 즉, 칭의와 성화를 분리시켜서, 칭의에서 성화를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거룩하게 살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했다. 필자가 중학교 때 대예배 때마다 목사님과 매주일 대표기도 하시는 장로님들이 이렇게 기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 주에도 육신이 나약해서 이런 죄 짓고, 저런 죄 짓고.....” 이 레퍼토리가 예배할 때마다 반복되었다. 왜 그런가? 바로 마귀가 칭의에 성화를 제거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주장을 잘못 해석해서,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유일한 변명으로 육신이 나약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나약한 육신이 죄를 짓고 회개하고...했기 때문에 말이다. 그 나약한 육신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죄값을 치루어 주셨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 4).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다해 믿어야 한다. 다시는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예수님처럼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즉, 의롭게 된 자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의롭게 되는 것은 성화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하게 된다. 따라서 죄를 이기며 살 수 있다. 지금 조지 윗필드 목사님은 이 설교를 통해서 칭의에서 성화를 제거하는 자에게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런 오해에서 벗어나라고 간곡하게 호소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면 의롭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갈 5:6). 자기 목숨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다. 아브라함처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믿을 때 의롭게 된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셔서 거룩하게 하신다. 이렇게 의롭게 되는 것 즉 칭의와,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성화는 하나로 연결된다. 구분은 할 수 있을지라도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헛되게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천이란, 예수님(크라이스트)처럼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가!


 


중생에 대하여(On Regeneration)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 : 17)




중생,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라는 교리는 거룩한 우리 종교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교리의 하나이다. 이렇게 중요한 교리를 성경에는 아주 평이하게 그리고 매우 빈번하게 기록되어  “뛰어가는 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중생이 우리 각자의 구원을 결정하는 핵심이고, 각 종파의 모든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동의하는 구원의 요점이지만,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분들이(신학자) 일반적으로 중생을 거의 언급하지도 않고 실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과장이 아니다.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이 중생과 같은 내용이 있는지조차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리상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일신 하나님 한 분을 믿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는 한 분의 중재자를 믿고, 인간으로 육화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이 말 자체는 사실이다.


자신들을 구원할 이름은 예수님이라는 이름 말고는 하늘 아래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중생하지 않았으며 거듭나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은 그리스도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예수님 보혈의 분깃에 참여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니고데모와 함께 외쳐야 할 처지이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라고 말이다. 아니면 사도 바울이 아테네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경우처럼 대꾸할 처지이다. “이 말더듬는 자가 뭐라고 말하는고? 이 자는 이상한 교리를 세우는 자 같군!” 이라고 말이다. 이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설파하고, 새롭게 태어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미력이나마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데 힘을 보태고자 한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연합시켜놓은 것을 분리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성화되지 않고, 자신의 본성이 변화되어 거룩하게 되지 않고, 그러고도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이 자신들에게 전가되었다고 헛된 망상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음과 같이 확대하여 해석해 보겠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도록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본다.


둘째,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다.


셋째, 바울 사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주장을 덧붙이겠다.


넷째, 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것 이상 추론해 볼 수 있는 내용 몇 가지를 도출해서 언급하고 한두 마디 권면의 말로 결론을 짓겠다.



I.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1. 외적인 공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기독교인이라 불리거나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의미로만 이 구절을 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당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거나 현실의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천부당만부당하다. “물로 태어난” 자가 “성령으로 태어난” 자인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이 사실은 너무나 쉽게 확인되며 분명히 그렇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으로는 전혀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외적 공표 내지 주의 이름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도 했다. “외형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다.” 이 말을 우리 기독교에 적용하면 명목상 크리스천이 다 참 크리스천은 아니다. 크리스천이기는커녕 그 근처도 못 온다.



우리 주님은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 이름으로 예언하고 설교하고 또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많은 기사를 행하여도 마지막 심판날에 버림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우리 주님은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 이 불의의 일꾼들아”라고 하실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보다 내밀한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이 당한 고난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외적 공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내적 변화와 마음의 정화를 통해 주님의 성령과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즉 참되며 생생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하는 이것은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영적 덕성(virtue)을 받는다. 이는 마치 머리와 우리 몸 각 지체의 관계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말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안다”고 했고, 즉 참된 크리스천을 안다고 할 때처럼 그렇게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고후 12 : 1-3참조). 또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서(빌 3 : 8 - 9)에서 간절히 소망하듯이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지기를 원한다고 했다(이 정도 수준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수준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분명 이상 살펴본 바대로다. 그런 차원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할례에 관해 언급한다. 이 주제는 오늘 본문의 주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외적인 크리스천이 참 크리스천이 아니다. 육신에 외적으로 표현되는 세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내적이며 세례를 마음으로 받고 단순히 물이 아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는 참된 크리스천이다. 이런 자에 대한 칭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할례든 무할례든 그것만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데 전혀 유용하지 않다.” 사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선언하는 바는 누구든지 진정으로 그리고 온당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명심하고 이제 두 번째 논의로 가보자.



II. 새로운 피조물이란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여기서 먼저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되었지만 이 말을 우리가 육체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뜻으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마치 원시적인 어떤 보잘것없는 존재로 돌아가 재창조되어 형태를 이루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니고데모가 무지하게도 상상했던 것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의미에 어떤 유익이 되겠는가?



“육체로 난 자는 여전히 육체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늘 그랬듯 세속적인 인간으로 남게 된다. 세속적인 부모로부터 나와 결과적으로 모든 죄악과 부패의 씨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간단히 말해 육적인 상태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어 정신적 품성과 기질을 함양해야 하고, 옛 사람의 방식을 전적으로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금광석 한 덩어리가 있다고 했을 때 이 금광석을 가공하여 다듬으면 전혀 다른 금으로 변하게 된다. 또 쓰레기 더미에 덮여 있는 빛나는 유리를 예로 말하면 이 유리를 닦아 투명하고 깨끗하게 만들면 이 유리는 새 유리가 된다. 문둥병에서 나은 나만의 경우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이 문둥병 환자의 살은 어린 아이의 살처럼 회복되었고, 이 자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 영혼도 야만적이기 이를 데 없지만 성령의 축복된 영향을 받아 온갖 더러운 것과 쓰레기와 문둥병에서 정화되고 깨끗하게 된다. 이 사람이 새로워졌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III. 이런 영광스러운 변화가 우리 심령 속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자신 말고는 아무도 성령의 주권적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에 반박하는 주장 자체가 필요 없다.



우리의 복된 주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바로 성령에 관해 물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그리고 우리는 자연 현상에 관해 들었을 때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보통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문제의 진리를 정리해 보자. 중생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말하는 이 교리를 자연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있으며, 우리 각자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주장한 것이다. 중생의 문제에 대해 보다 상세히 언급하겠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확증할 정도의 논의는 될 것이다.



1. 하나님 자신이 성경에서 이 점을 말했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된 구절들 상당히 많이 뽑을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고 그래서 율법의 영적 의미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했던 니고데모가 중생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 기이하게 여겨진다.



니고데모는 중생을 이야기할 때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한가? 라고 우리의 복된 주님께 묻고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제 안에서 온전한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나님께 너무나 자주 간청했던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들도 다같이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 가지라고 경고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하나님인 주님께 돌이키라고 했다. 구약에 있는 중생의 교리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신약에서 너무나 자주 그리고 너무나 평이하게 인용되고 있어 달리는 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선생님 자체이셨던 분(곧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사람(자연적으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주장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지 못하게 하려고, 즉 우리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해 니고데모와 같이 이 교리를 거부하지 않도록 하려고 우리의 복된 주님은 맹세로 이 주장을 확언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이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해 읽어도 된다. “아멘인 나, 진리 자체인 나는 네게 이르노니 이것은 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변할 수 없는 약속이니, 곧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가 된다. 



이런 부류의 말씀을 사도들의 여러 서신에서 무수히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질 것”을 요청받는다. 이는 우리 마음 가장 깊은 품성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부패한 옛 사람을 벗고 참된 의와 거룩함 안에서 하나님을 따르도록 창조된 새사람을 옷 입는 것이다.



옛 것은 마땅히 지나가야 하고, 모든 것은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는 “중생이라는 씻음으로, 곧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구원될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오늘 본문에서 뽑은 말씀을 적절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굳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사도 바울은 확고하게 다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여러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보자. 다시 태어나는 것(중생, 새롭게 태어남)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옷 입는다는 것, 우리 마음의 영이 새롭게 되는 것, 새 피조물이 되는 것, 이런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고 실제적인 마음의 내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앞에서 열거한 표현들이 실제적이지도 않고 확고한 의미도 없는 빈말이고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개중엔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불행하도다. 이들이 이렇게 비유로 해석하는 것은 전혀 부러운 일이 아니다. 또 이들이 자신들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게 아니라면 할 말이 없다.



이 구절들 외에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찾아봐도 똑같은 진리를 확증할 뿐이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너무나 평이하고 확실한 내용이라 아무도 그 내용을 부인할 수 없다. “회심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고,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며, 자기 마음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귀로 들으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도 있다.



2. 하나님은 성결하시고 인간의 현 상태는 부패하고 오염되어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의 영으로 묘사되어 있다(지금 이야기는 성경을 안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무한히 성스러운 존재로 “너무나 순결한 눈을 지니셨기 때문에 불의를 볼 수 없다.” 정말 초월적으로 거룩한 분이시다. 그래서 “천국조차도 하나님 눈에는 깨끗하지 않으며 천사들조차도 흠이 있어 보인다.” 한편 인간은 전적으로 “죄로 잉태되고 태어난” 피조물로 묘사되어 있다(모든 중생한 사람은 이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알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조금의 선한 것도 거하지 않는다.” “세속적이고 죄악 가운데 팔린 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에 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히 합치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더럽고 부패하고 오염되어 곤고한 자인 인간이 변화하여 어느 정도나마 하나님같이 되기 전에 어떻게 무한히 성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는가?



불의를 볼 수 없는 성결한 눈을 가진 하나님이 불의와 거할 수 있는가? 천국마저도 깨끗하지 않게 여기시는 분이 불결함 자체와 함께 거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빛이 어둠과 교통하고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합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 고려해 보자.



천국을 세부적으로 특별하게 묘사하기란 헛되고 주제넘은 짓일 수 있다. 왜냐하면 “거룩한 예수님의 신실한 추종자들에게 예비된 것들은 인간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의 천국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서 누릴 것조차 인간들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윤곽을 그려보겠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닦아놓은 행복도 영적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세속적 마음이 변하여 영적으로 되지 않는다면 빛 속에 있는 성도들이 향유할 유업에 절대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패역한 자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우리의 모든 탐욕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교도들이 생각하는 천국에서처럼 감각적 즐거움을 최대로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직 영적인 관계로 깨끗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이 축복된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의 향취를 조금이라도 맛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총체적으로 혁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전능한 하나님의 돌이킬 수 없는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거룩함이 없이는 (중생으로 성결하게 되고 그럼으로 심령에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모습을 갖게 되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거룩한 주님께서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shall not이 아니라 cannot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모든 이치를 보더라도 우리가 어떤 것을 누리려고 할 때 거기에 합당하게 우리 기질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면 우리가 어떤 편안함이나 만족함을 전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음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귀머거리에게 들려준들 무슨 기쁨을 누리겠으며, 가장 뛰어난 그림을 소경에게 보여준들 무슨 즐거움을 얻겠는가? 미각을 잃은 사람이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겠는가? 또 더러운 돼지가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에서 기뻐할 줄 알겠는가? 그럴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어진 즐거움을 감지할 수 있는 합당한 마음의 기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심령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죽음으로 심령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더 깊은 차원의 즐거움이나 고통을 감지하는 능력이 확대된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엄과 함께 그 즐거움이 표출될 것이다. 그리고 땅에서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이 즐거웠다면 거룩한 천사들과 교통하고 사귀는 것은 더욱 무한히 즐거울 것이다. 천국에서 인간의 영은 완전해진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상태라면 우리의 영혼은 전혀 행복할 수 없을 것임을 우리 자신이 잘 안다. 하나님 자신이 이 축복받은 자의 영역으로 그런 자를 허락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네 번째 논점을 말해야겠다.



4.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복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첫 번째이자 주된 목적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죄값으로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구주의 죽음으로 단지 우리 죄 사함만을 받은 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크게 기뻐할 이유는 별로 없는 셈이다. 저주받은 불쌍한 죄인인 우리는 숙명적인 질병으로 멸망하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구주의 죽음으로 그의 심판에서 용서함을 받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자로서 복락에 이르기에 법적 장애가 있다는 것은 물론 본성상 도덕적 불순함 때문에 어떤 강력한 변화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까지 (이미 앞에서 입증되었듯이) 천국을 향유할 수 없음을 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온전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구주께서 자신의 보혈로 산 복락을 우리가 향유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며, 자신의 완전한 순종을 덮씌우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성화하고 정화하며 깨끗이 하고 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고 하였다. 

    




이시형 보혈로 사신 복락을 모두 향유하게 하소서!
아멘!
[ 2023/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