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이 시대의 희망은 진정한 복음에 근거한 종교개혁

그 이상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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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
최용환    2011-06-11 00:5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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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령론2  

(3)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란 세례 의식에 참여함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정하면서 세례 의식이 중생하는 데 요긴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허황되고 미런스럽고 주제넘은 것이다. 세례를 받아야만 중생한다는 생각은 죄용서를 받고 거듭나는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창조적으로 중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란 죄인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turning to God).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성령의 사역에 의해 하나님을 따르며 섬기는 것을 말한다.



중생이란 단지 외적인 표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제도나 방법에 의해서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본질적으로 수단과 표시인 것이다. 세례란 믿음의 교리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경우를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




세례 의식의 외적인 시행은 물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다. 물로 씻는다는 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례는 양심을 씻어 선하게 하는 표이다. 죄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도덕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거룩한 순종을 하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히 9:14; 롬 6:3-7). 사도 바울은 외적인 의식중생을 평이하게 구별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자뿐이니라”(갈 6:15).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할례라는 것은 모세 율법의 의식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무할례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선포된 복음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구별하여 언급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즉 중생한 자가 구원에 참예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세례받는 것이 중생하는 것이라면, 모든 세례받은 사람은 반드시 중생이 필요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자면, 마술사 시몬이 전도자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중생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행 8:12-24). 그가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중생하지 못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보고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았다(행 8:17). 시몬의 경우를 볼 때 분명히 그는 세례를 받았지만 새롭게 중생은 하지 못한 기록을 볼 수 있다.




(4) 중생은 생활의 변화로 되어지지 않는다




중생은 삶과 행동에 있어서의 도덕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중생을 모든 알려진 실례들로 확대해서 생각하려고 한다. 음탕한 사람이 절제하게 되고, 약탈자가 의롭게 되고, 교만과 부정한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에서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즉 모든 실례를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천성과 같은 것으로, 또는 가장 엄격한 도덕주의자의 규칙으로 규정된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중생을 이 세상에서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서, 노력과 정확과 신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인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므로”(벧후 2:20)와 같은 말씀을 복음적인 설교로 듣거나, 또는 그런 교리를 복음으로 들음으로 설득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 위에 믿음과 회개의 공언과 함께 세례를 추가한다고 해도 그것이 중생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이 중생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한, 우리들 중에 몇몇이, 그들의 지리멸렬한 생각과 궤변에 가까운 표현을 우아하게 만들어, 도덕성인 체하는 주장을 여기에 확대하여 포함시킨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실제적인 의로움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선천적이고 타고난 의로움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을 부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복음을 뒤엎는 자이며, 성령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전 역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야만 한다. 이러한 우리들의 주장이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거부되기도 하고 조롱받기도 하였다. 우리의 주장을 거부하는 자들은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우리의 적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는 교리에 의해서,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도덕적으로 반대 받고 배척받는다. 그러므로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심판하시고 선언하실 것이다. 만일 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시종일관 진리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한다면 양심적으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어떤 법령을 범할 자유를 소유하지 못했으면서도 저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리나 주장보다도 부패하지 않은 그 어떤 자유를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우리들의 열매(결과)에 의해서 우리들의 교회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들의 교리를 부인한 자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단언하는 것은 우리들의 윤리나 도덕적인 측면에 대해서 계획이 없다 하더라도 기독교 윤리와 도덕은 앞으로 개선된다고 하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올바른 기초 위에 정착되어 무성하게 성장할 것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선을 행하는 선한 사람이 또한 증가될 것이다. 무지하거나 타락한 사람들의 소동과 소요에 의해서 이러한 계획이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내려놓고 경멸하고 거부하고 논쟁만을 일삼으려고 하는 사람은 성공의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다.



만일 중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에는 새롭고 참된 영적 요소가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단순히 삶과 변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증거하고 확증하였으나 다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이 삶의 개혁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인 의무이고, 필연적으로 요구되지만, 우리는 이것을 중생이나, 또는 중생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순종의 전 과정과 복음에 따라서 중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삶의 개혁안에 중생의 여지가 있거나, 중생이 그것으로 구성된다고 실제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후에 하나님께도 선언하실 것처럼, 하나님께서 수용해야할 의무로서 포함시키지 않을, 실제적-복음에 대한 순종에 관한한 외재적 것(삶의 개혁)을, 중생이라고 설명하고 묘사한다.



[2] 분명하고 확실한 개혁이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하게 일어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불완전하게 일어나는데, 개혁의 요소는 분명히 신실한 것이다.


중생을 수동적이거나,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고려하기에 앞서 묘사된 원리가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삶의 개혁이 항상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몇 명 사람에게는 더욱더 완전하게 일어나고, 몇 몇 사람에게 불완전하게 일어나지만, 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본질상 같은 은혜가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등급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그 관심과 열심의 정도의 다소간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삶의 개혁이 다양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중생이 우리의 성정의 영적인 삶의 개혁을 포함한다고 믿고 말한다. 현대 소시니언들은, 중생을  도덕적 개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성정의 회복이 삶의 도덕적 개혁을 낳을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이러한 삶의 도덕적 개혁이 우리 성정의 영적인 회복으로부터 나온다가고 여긴다면, 이러한 차이는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해서 믿음의 조상들이 주장한 것은 먼저 성령을 받음으로서, 모든 은혜가 그에게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애매하고, 불분명하고, 비성경적으로, 더 나은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며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 혼동스러운 결과와 원인들, 습관과 행동, 기능과 동력 그리고 임시적인 조치들, 주입된 원리들과 요구된 습관, 영적이고 도덕적인 은혜와 습성들을 말하려고만 한다면,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적인 원리,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 또는 은혜로운 능력들이, 중생으로 인해 요구되어지거나, 또는 그 안에 성령의 역사 또는 산물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태어난 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중생에 있어서 이러한 특성은 아주 분명하다. 이에 관해서는 성경에 풍부하게 증명되어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운 행동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질, 새로운 능력, 새로운 힘으로 새롭게 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부른다(벧후 1:4). 이 신의 성품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 가운데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가졌다는 뜻도 아니다. 신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사역의 요소이며 신적이며 영적인 요소이다.-습관적으로 거룩한 요소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들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여기에 보면 중생의 사역이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기초는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새롭게 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또는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중생의 원리가 우리들 가운데 주입될 때 우리들의 심령을 전면적으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이다. 중생의 원리모든 영적인 행동과 도덕적인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리는 옛 사람을 싫어하고 부패한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의 원리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롬 6:6).



중생의 원리는 누추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게 하며 우리의 말씨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구사하도록 이끈다. 왜냐하면 중생의 요소는 사람의 말씨까지도 다르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며 유효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다. 창조의 역사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중생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창조력에 의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인데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어진다. 그러므로 중생은 단지 삶의 개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아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하나님을 따라서 선행을 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새 사람이란 “의 안에서 창조된 사람이며 진실한 거룩함 속에서 창조된 사람”을 뜻한다. 이 사람은 천진난만함 속에서 창조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란 삶이 개혁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덕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결코 선행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그의 전 인격이 의롭고 바르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중생(복음적으로 인생이 개혁됨)하여야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눅 6:43). 나무가 존재하는 본질은 열매를 맺는 데 있다. 열매가 나무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의 본질(품질)을 바꾸는 것이다.



나무의 형편에 따라 그 열매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30)는 말씀처럼 좋은 열매(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 본성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중생의 은혜와 택함받은 자들의 순종과 거룩함을 구별하고 있다(겔 36:25;렘 31:33;32;39).



즉,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우리들의 본성을 씻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다. “돌같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시고 살같은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법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기시는 것이고, 우리들 속에 영을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유효한 결과에 의해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준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이 바뀌어지고 하나님께 순히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롬 6:3-6;골 3:1, 5;엡 2:10;4:23 등).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역이 성경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만일 어떤 사람의 삶에 변화가 있는데 도덕적인 부분에서만 변화가 있다면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영적인 교훈이 분명하게 성취도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적인 범위에서만 영향을 받은 것이지 온전하게 거룩하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온 영과 몸이 완전히 성화도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중생이란 본질적으로, 원인적으로, 유효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중생이란 명칭도 없고, 약속도 없고, 의미도 없고 능력도 없고,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무례한 펠라기안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파괴시키는 자들이다.



이러한 무모한 발상들은 원죄를 부인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만일 사람이 본래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영적으로나 내적으로 복구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죄 짓는 습관을 버리고 삶의 변화가 있을 때 언어가 바뀌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중생이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영적인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들의 완악한 고집을 내버리고 새 생명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우리들의 무질서한 기질들이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정면으로 반대하던 견해가 바뀌어져서 초대 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고 경험 많은 신자들의 체험을 하게 되어 무지한 자리에서 확신의 자리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5)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인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나 광희, 또는 음성 비슷한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일부 연약한 사람들에 의해 가장된 적이 있었고 잘못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위장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들이나 이러한 것들을 기대하도록 가르치는 교훈들이 묵인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심하는 것같이 중시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거룩하게 되는 것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성화를 중상하고 잘못된 것인양 비방도 하였다. 물론 우리들의 글이나 가르침이 충분히 증거되었지만, 그래서 우리들의 견해가 부정적인 원리처럼 여겨졌었고 성령은 다만 그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역사하였고, 사람들의 본질에 동의하는 정도에서 역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성령은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을 사용하신다. 악한 영이 사람들의 몸과 씨름하는 것같이, 성령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이성을 사용하셔서 합리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진리의 영을 받는다. 실로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의 심령을 일깨운다[고대 사람들은 이것을 항상 은혜의 영감이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창조적인 능력 이상의 것을 부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와같이 성령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역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 위에 강압적인 힘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본성에 알맞게 우리들의 능력 안에서 능력에 따라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지만 중생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세상은 이미 보았다(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광적이며 열광적이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예는 예후에게도 볼 수 있다(왕하 9:11).



물론 예수님도 미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적이 계셨다. 특히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여 붙들러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막 3:21). 또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서 베스도가 미쳤다고 하였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에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행 26:24, 25). 지혜서 저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하였다.



성령의 사역인 중생은 복음을 전하고 듣는 자들에게서 많이 언급 되었고 생각하게 되었다. 복음 전파자들은 특별한 이유에서 중생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역을 할 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이며 이것은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은 성도들이 회심하고 믿게 될 때 자신을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말할 때 그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몬 10). 주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문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26:17,18).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목회 사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의무와 사역을 이해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중생의 교리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고, 중생의 성질, 원인, 효과, 그리고 확증 등은 목회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옳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역자는 부끄러운 일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성령을 격노케 하고, 경멸하고, 비방하고, 모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은 지루한 기차와 같다고 말하고, 중생은 파악하기 어려운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머리를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유인하고, 경건한 슬픔으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굴욕적인 징조가 있다”고 중상모략한다. 저들은 특별한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도 없이 도전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섣불리 이러한 자들을 반격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진리로부터 멀어져간 자들과, 종교의 힘에 떨어져 나간 자들과, 복음의 원리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과, 종교의 힘에 떨어져 나간 자들과, 복음의 원리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내버리고자 하는 자들은 우리들의 개혁교회의 온전한 지위에 이르지 못하고 슬프고도 불길한 조짐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자신을 바로잡고 억제하지 않는 한 소망이 없는 것이다. 내가 단언하는 것은 저들의 본성을 바로잡는 길은 모든 복음 전파자들의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저들에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중생-의 본질을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더 이상 도전하거나 중상하지 못하도록 복음 전파자들은 그들의 직임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복음 전파자들의 말을 만일 저들이 듣는다면 “죄와 허물로 죽은”상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약속된 자들이라면 저들은 중생의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중대한 사역을 게을리하고 소홀히 여기기는 것은 정신이 잘못된 사람일 것이다. 중생의 교리에 대해 무지하고, 하찮게 여기고, 중생의 경험을 그 심령에 사모하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는 자이며, 우리들 가운데 중생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역자는 무익한 사역을 한 자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고 또 들을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 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점을 모든 기독교 교수들이 개인별로 연구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이 저들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저들에게 눈가림을 하고 속이는 자들은 지옥으로 갈 자들이다. 이러한 교리는 우리들에게 이미 평범하고도 충분히 계시되고 가르쳐졌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의무와 권면이 중요함을 알았고 우리의 본성과 관심이 무엇인가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리석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행할 수 없고 나태하고 태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문제에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있다는 큰 위험성이 있고, 이 일로 인하여 영원한 상태로 떨어질 요인도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들이 치명적인 오류에 빠져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듭났든지 거듭나지 못했든지 간에(요 3:6) 아직도 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령론>, 존 오웬, 여수룬, pp.17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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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구원> '38장 존 오웬의 중생론'에는 오웬 목사님의 거듭남의 정의와 그 특징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2. 거듭남의 정의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비추어진 구원하는 영적인 빛에 의하여 우리 마음속의 타고난 무지와 어둠과 소경됨이 제거되고, 영적인 생명과 의의 새로운 원리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 의지의 부패함과 완고함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 속에 부어져서 우리 정서의 무질서함과 반역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은 새로운 원리의 주입


"거듭남에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생명과 빛과 거룩과 의로움을 갖기 위하여 영혼과 영혼의 기능 속에 새롭고, 실제적이고, 영적인 원리가 주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그것과 정반대되는 원리, 즉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을 대하여 적의를 갖게 하는 타고난, 습관적 원리를 축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도현 아멘! 아멘!! 존 오웬 목사님의 중생에 대한 고찰이 놀랍습니다.
얼마나 거듭남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셨는지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신앙위인들이 한결같이 강조했던 이 위대한 진리가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왔다는 사실에 깨어서 근신해야하는 우리의 사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 2013/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