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대각성 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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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의 개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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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
최용환    2011-06-11 00:5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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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성령론1  

이 글은 존 오웬 목사님의 <개혁주의 성령론>에서 중생과 관련된 성령의 사역을 설명한 글이다. 오웬 목사님은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해 나간다. 특히 존 오웬 목사님은 중생은 새창조의 역사로서, ‘성령의 주입’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일 중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에는 새롭고 참된 영적 요소가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단순히 삶과 변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적인 원리,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 또는 은혜로운 능력들이, 중생으로 인해 요구되어지거나, 또는 그 안에 성령의 역사 또는 산물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태어난 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주입이라는 개념은 오웬 목사님의 중생론의 핵심이다. 이 개념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중생론에서 더욱 발전된다. 특별히 존 오웬 목사님에게나 에드워즈 목사님에게나 성령의 주입된 은혜는 새로운 삶의 원리가 된다.




“중생의 원리가 우리들 가운데 주입될 때 우리들의 심령을 전면적으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이다. 중생의 원리모든 영적인 행동과 도덕적인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리는 옛 사람을 싫어하고 부패한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의 원리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롬 6:6).”


 


청교도의 왕자(황태자)라 불리우는 존 오웬 목사님의 ‘성령론’은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따라서 에드워즈 목사님의 ‘성령론’과 비교해서 보면 매우 유익할 것 같다.




* 차례




1. 새 창조의 완성




2.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1) 중생의 성격


(2)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3)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4) 중생은 생활의 변화로 되어지지 않는다


(5)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 아니다








제1장




새 창조에 있어서 중생시키는 성령의 사역




새 창조의 완성 /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구약성경에서의 성령의 사역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더욱 명백한 성령의 사역은 중생이다. 이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생활이 변화도니다고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변혁이 일어나고 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을 동반하지 않는다. 중생의 교리는 중요하다.


 


1. 새 창조의 완성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준비되고 형성될 때 성령의 사역이 있었다는 시실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고 복음 국가와 교회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일의 전부는 아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준비하셨던 것같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을 준비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이룩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준비하셨던 것같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을 준비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이룩하셨다. 성령께서는 옛날 창조하실 때에 역사하신 것같이 새로운 창조 때에도 역사하셨다.



첫 번 창조 때에 모든 만물은 흑암과 생명이 없었다. 모든 만물에는 생명도, 생명의 근원도, 생명의 기미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성령께서는 준비된 물질 위를 운행하시며 생명이 필요하고 생명을 가져야 할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요소를 주시어서 그것들로 하여금 활기를 띠게 하셨다.[“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이것도 새로운 창조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어두움과, 죽음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영적인 생명의 요소와 그 기미까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태 하에서 성령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게 되었다. 즉 의로운 사람들이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민들과 유효적으로 교통하시기 위하여 영적인 생명의 요소를 그 선민들에게 부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민들의 중생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셨다. 이제 성령께서 행하신 중생의 사역을 살펴보자.





2.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1) 중생의 성격



중생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3~6).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은 고대 유대 교회의 교사이며 책임자로서 유식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셔야”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와서 거듭나는 문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의 믿음과 순종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하기 위한 요소들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아신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중생이 필요한 것도 잘 알고 계신다. 니고데모와의 만남과 중생에 대한 교훈은 제일 첫 번째 있었던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중생에 대한 성격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주님은 중생의 이유와 중생의 효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중생은 물과 성령에 의하여 된다고 하셨다. 제일 주요하고 유효한 요인으로서의 성령과, 중생의 증거와 표시와 보증으로서의 물로서 중생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맨 처음에 하신 약속의 증표이기도 하였다. 물로 씻는 예식, 즉 세례는 세례 요한에 의해 사람들에게 이미 가르쳤던 교리이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다시 말씀하신 것은 배로 증가시켜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물로 말씀하셨고 종종 그렇게 약속하셨다.



중생의 사역에서 성령은 유효적인 원인이 된다. 따라서 중생은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3:8). 똑같은 목적에 대한 말씀이 또 있는데 그 말씀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느니라”(요 1:13)이다.



중생은 피나 육이라고 하는 자연적이고 육적인 방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온전히 거부되고 다만 하나님에 의하여 유효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한 것은 육적인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과 성령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새롭게 태어나는 중생은 영적인 문제이며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 즉 다시 태어난다고 부르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요3:6).



이것은 비슷한 언급인 동시에 정반대의 언급이기도 하다. 영으로 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활동적이며 활기차게 살게 된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 새롭게 살아났기 때문이다(엡 2:1,5). 그래서 지난 날과는 다르게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요 6:63;롬8:9,10).



같은 진리를 주장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


이러한 말씀들을 살펴볼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도 분명히 구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사랑에 있다. 이러한 인자하심과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우리에 오신 바 되시고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중보를 연결시키시는 유효적이며 직접적인 요인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이 유효적으로 회복되고 중생의 씻음이 되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정화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이시오 중생의 창시자이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고대 사람들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해 힘찬 논쟁들이 있었고 그 사역의 위대성과 권위에 대한 격론들이 있었다). 온전한 기독신자라고 한다면 대체적으로 이러한 진리가 조롱을 받고 파괴되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진리를 더욱 입증하고 옹호하여야 한다. 나는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중생의 교리를 완전하게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겠다.


중생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루었으므로 지금 내가 다루고자 하는 점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를 확고히 세우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격렬한 공격과 독성을 내뿜는 주장에 대하여 변증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1]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 어떤 사람들이 중생하였다는 구약 성경의 중생에 대한 교리, 또는 중생에 관한 계시는 그렇게 선명하지 못하다. 선명하지 못하다는 말은 중생에 관해서 언급된 복음서의 밝고 분명한 내용을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분명한 복음서의 언급은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중생의 교리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때에 니고데모는 감탄과 놀라움으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소리치며 질문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고 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중생의 교리가 이미 알려졌는데 어찌하여 선생 된 사람이 모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중생의 교리는 성경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렇게 중요하고 기본적인 교리에 무식하니 그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무와 교리를 가르치지만 말고 자신의 무식함을 깨닫고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배우라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과 대화가 없었더라면 중생에 대한 교리와 그의 무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이미 구약 성경에 언급되었고 약속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돌같은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약속하셨다.


[2]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중생의 교리는 그렇게 밝고 선명하게 선언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가르치는 당시 최고의 교사였던 니고데모 자신도 중생에 대하여 아는 바각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생이란 단지 삶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말씀에 따라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니고데모도 만일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을 읽었다면, 분명히 그의 삶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에게 제안하신 것은 그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전에는 그러한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이름으로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지했던 것이고 신성모독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르지만 은유적으로 삶을 고쳐야 한다는 표현에서 중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 모른다. 만일 중생이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 이상이 아니라면 그들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생에 관해서 가르치신 것은 유대의 선생들에게서, 이방의 철학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는 흑암과 모호한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던지신 것이다.


비록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분명하고도 실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중생의 교리는 전에 그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우월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생이 도덕적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였다면 그것은 어둡고 무지한 가운데 있다고 보겠다.


신약 성경을 기록하는 데 의도되어진 사람들의 영혼 위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신비함과 은밀함은, 삶을 개혁시키고 도덕적인 훈련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적인 기능을 증진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 서신과 같이 세상에 이미 출간된 모든 책 속에는 중생의 교리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1


우리는 중생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을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사람들에게서도 전달받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밝고 분명하게 나타난 사실을 본 그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생과 중생의 교리는 구약성경에도 있다. 하나님의 모든 선민들은 그들 당대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복음서를 보면 중생에 관한 교리는 더 크게 확장되어 옛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생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생의 사역은 더욱 분명하고도 독특하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중생의 영혼의 의사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교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고치시되 우리의 병든 인성을 내적으로 치료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싸매 주시고 부패한 본성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교정시켜 주신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복음서에 더 이상의 충분하고도 평이하게 선포된 중생의 교리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슬픈 본성들은 진리의 빛과 증거를 거부하고 성령의 위대하고 거룩한 사역을 멸시하고 적대하기 때문이다.


(2)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중생이란 지금까지 존재하여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또는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할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똑같은 사역에 의하여-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중생의 역사는 외적으로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되어 일어난다. 그 어떤 명령도 이 방법을 제한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중생이란 ‘썩지 않게 하는 씨’라고 말씀하셨다. 때때로 어린 아이들에게는 말씀이 없이도 중생이 나타나기도 한다. 바울의 경우와 같이 특별한 역사도 있고 일반저인 방법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방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제도이다.


중생의 사역은 그 역사에 따라서 눈에 보이는(자각) 다양한 면이 있는가 하면 은밀하여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우리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요 3:8).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서, 또는 양심 가운데서 분명한 증거와 표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속에 ‘나타내셨다’고 하였다(갈 1:16).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셨다(고후 5:17). 즉 ‘거듭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 안다. 많은 사람들이 흑암 가운데에 살고 있다.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사 1:10). 그러나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행하고 있다.



새로운 피조물은 다양한 방면에서 성장하고 완전을 향해 역사한다. 어떤 사람은 속도가 빠르지만, 또 어떤 사람은 늦다. 뿐만 아니라 열매도 적은 것을 맺게 된다. 성령의 사역은 본성적으로 한 분의 사역이요 같은 사역이지만 나타나는 모양은 다양하다. 구약 성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민들의 중생이 다르고 신약 성경 속에 있는 성도들의 중생이 다르다. 중생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한 사람) 기적적으로 회심하는 경우도 있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비한 은사를 받아 일시에 수천 명씩 회개하는 경우도 있다.



신비한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중생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은 성령에 의해 중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결단코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고집한다. 이것은 대단히 무식한 생각의 결과이며 잘못 믿는 것이다. 저들은 성령의 사역을 낡아빠진 옛날의 기적으로 취급하고, 이제는 이성적인 법칙으로 이해하고, 이성적인 방법에 의해 중생한다고 주장한다. 중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유효한 사역으로 중생을 경험하였음에도 헛된 말을 하는 것은 믿음 없는 소치인 것이다. 중생의 사역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 상태가 모두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악함에는 그 차이가 있으나, 그들의 상태에는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멀리하고 한 가지로 저주 아래 있다(시 51:5, 요 3:5, 36, 롬 3:19, 5:15, 엡 2:3, 딛 3:3, 4). 본질상 성령의 사역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길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방법은 성령의 역사밖에는 없다.



[2] 중생한 사람의 상태는 모두 같다. 중생의 정도는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소유했고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거룩한 정도의 차이나 성화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중생의 정도의 차이는 없다.



[3] 중생의 유효한 사역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한 역사이다. 중생의 사역은 우리들의 내적인 부분을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시고 내적으로 성령의 은혜와 교통하는 것이다. 동시에 외적으로는 성령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준에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높은 체하고 성령의 사역을 멸시하고 그들의 생각을 고집할 때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시도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보다는 자기의 관심거리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그들은 위장된 기쁨을 소유하며, 거듭나야 하는 진리를 그들의 이성으로 경멸하고 새 생명을 질시하며 산다. 하나님을 따라 인내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참지 못하시고 벌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요구하고 가르치는 대로 증거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된 것이 무엇이며, 참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해야 한다.





정도현 감사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얼마나 '중생'을 강조하셨는지,
핵심 중의 핵심으로 여기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 2013/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