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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
노병기    2011-03-29 13: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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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거듭남 체험  

 

『거룩한 구원』


제37장


존 오웬의 거듭남 체험







          ‘청교도의 왕자’라 불리는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1616년 영국 옥스퍼드 주 스태드햄(Stadham)에서 청교도 교구 목사인 헨리 오웬(Henry Owen)의 아들로 태어났다. 존 오웬은 웨일스의 높은 신분과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글로모건의 왕 그위건 압 이델의 후손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 루이스 오웬(Lewis Owen)은 북웨일스에서 부시종장 및 재무부 남작이자 메리오네스 지방의 최고 사법 장관이었다. 오웬의 아버지인 헨리 오웬은 옥스퍼드에서 언어와 철학,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근면하고 타협하지 않는 청교도 교구 목사였으며 능력 있는 신학자였다. 그는 당대의 지배적인 교회 권력에 굴종하지 않음으로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혔다. 후에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어릴 때부터 평생 동안 비국교도(Nonconformist)였으며, 주의 포도원에서 수고하는 일꾼이셨던 아버지의 돌봄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의 예배와 관련된 어떤 것에 대해 확고한 지식을 갖게 되면 동시에 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1)




  1660년 이전까지 비국교도란 공동 기도서의 법규 중 어떤 것을 무시하고 교황제 안에 있는 미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피하고자 했던 영국 국교회 안의 성직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2) 


  어린 시절부터 오웬은 청교도였던 부친을 통해 칼빈주의 사상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절대 권위에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조숙한 천재로 불릴 만큼 어릴 적부터 탁월한 지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1628년 열두 살 때 옥스퍼드 퀸스 대학(Queen's College)에 입학했다. 그의 형 윌리엄도 그때 학생으로 있었다. 두 형제는 1632년에 옥스퍼드의 퀸즈 대학에서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635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오웬은 지독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겨우 4시간 정도의 수면 시간 외에는 독서에 전념했다. 이러한 습관을 평생 계속하여 노년에는 건강을 잃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의 옥스퍼드에서의 생활은 돌연하고 예기치 않게 끝이 났다. 청교도를 강하게 박해하는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가 1629년 옥스퍼드 총장이 되었는데, 오웬은 1637년 양심상의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세상에서의 출세의 소망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 배경을 살펴보자. 로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서 청교도주의를 강하게 반대했다. 로드의 안내로 찰스 1세(1625~1649)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회 고위직에 기용했다. 로드는 일찍이 1604년에 ‘주교 없이는 진정한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1633년에는 월리엄 로드가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로드는 더욱 강하게 영국의 종교 개혁가들이 가장 강력하게 거부한 많은 로마 가톨릭 의식과 의례들을 대학에 채용하도록 요구했다. 오웬은 신앙 양심상 로드의 요구에 따를 수 없었다. 오웬은 로드의 폭정을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정하는 죄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21세의 나이에 양심에 따라 자진해서 학위를 포기하고 옥스퍼드 대학교의 문을 나와 추방자의 신세가 되었다(1637년).


  오웬이 옥스퍼드를 떠난 것은 그의 유망한 장래가 한꺼번에 무산되는 것이었다. 또한 왕정주의자 삼촌으로부터의 지원도 잃게 되는 것이었다. 삼촌은 오웬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된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고, 오웬의 행실이 마음에 드는 경우에 그의 영토를 물려줄 상속자로 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복음 18장 29~30절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옥스퍼드를 떠난 지 약 14년이 지난 1651년에 오웬은 옥스퍼드 그리스도 교회의 수석 목사로 되돌아오게 되고, 1652년에는 부총장이 된다.


  오웬은 1637년 옥스퍼드를 떠나기 얼마 전에 벤크로프트(Bancroft) 주교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21세). 옥스퍼드를 떠난 후 그는 로버트 도머 경의 가족 목사이자 맏아들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러블라스 영주 가족의 목사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로드를 반대하고 학교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영국의 정치 상황은 급변하였다. 1640년 11월에 활동을 시작한 ‘장기 의회’(1640~1660)에는 청교도들(주로 장로교계)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제는 거꾸로 로드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642년 1월에는 왕당파와 의회파(장로교계 청교도)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시민전쟁이 일어나자 의회 편인 오웬은 왕당파인 러브라스 가족과 결별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왕당파 삼촌과도 완전히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42년에 런던으로 건너온 오웬은 축복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거듭남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26세). 그때까지 오웬은 비록 청교도의 가르침과 정책을 받아들였지만, 영적으로는 고통 속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강한 교리적인 확신을 갖는 것과 하나님 앞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오웬은 나이 20세 초에도 영적인 각성을 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죄악을 깨닫게 하셔서, 그는 죄 문제로 심히 고민하다가 3개월 동안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기피하였고, 말을 붙여도 거의 조리 없는 말밖에 할 수 없을 정도의 언어 장애를 겪었다. 초기 전기를 보면, 오웬이 약 5년 동안 영적인 암흑기를 겪었다고 나온다.


  오웬은 런던에서 토머스 굳윈의 설교를 통하여 영적인 도전을 받았고, 또 리처드 십스와 존 코튼의 글을 읽음으로 자신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1642년에 드디어 오웬의 어깨에서 무거운 영적인 짐이 떨어져 나간 때가 왔다.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박사는 당시 알더만베리 교회에서 사역했으며, 남자다운 웅변으로 군중들을 매료시켰다.




  “어느 주일 아침 오웬은 당시 명성이 대단했던 장로교 설교자 칼라미 박사의 설교를 들으려고 알더만베리 교회로 갔었다. 그러나 칼라미 박사 대신에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한 무명의 낯선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몹시 실망했다. 같이 갔던 친구가 교회당을 속히 나가 또 다른 유명한 설교가가 있는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그러나 오웬은 이미 너무 지쳐 있어서 남아 있기로 하였다. 강단에 선 사람은 간단하지만 진지한 기도를 한 후에 성경 본문을 소개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26). 그 말씀을 듣고 즉시 오웬은 그 말씀이 자신의 현재의 마음 상태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를 통하여 자신의 상태에 필요한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하였다. 그 기도는 곧 응답이 되었다. 설교자는 오랫동안 오웬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바로 그 의문을 해결해 주는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설교가 끝났을 때 그 설교자는 오웬을 결코 떠나지 않는 평안의 광선이 비취는 곳으로 인도하는 데 성공했다.”3)




  영적인 침체에서 완전히 벗어난 오웬은 1642년 3월에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실상』(Display of Arminianism)을 첫 출판했다. 그는 1643년 에식스의 포드햄(Fordham)에서 사역했고, 그해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소집되었다. 1645년 의회는 로드를 대역죄로 처형했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오웬은 처음에는 장로교적인 생각을 가졌으나, 1646년 존 코튼(John Cotton)의 저서인 『천국의 열쇠』(The Keyes of the Kingdom of Heaven, 1644)를 읽고 감명을 받아 장로교인에서 독립 회중교회 지지자로 선회했다.


  1646년 오웬은 코게샬(Coggeshall)의 교구 목사가 되어 교구 제도 안에서 회중 교회 원리를 그곳에서 적용했다. 그는 영국 국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화해야 할 것과, 감독주의적 국교회 정치는 지역 교회의 자율과 교역자 사이의 평등을 기초로 한 회중 중심의 교회로 개혁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오웬은 코게샬의 회중 가운데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보다 작은 교회를 형성하여 그들에게 성찬을 집행했다.


  1649년에는 찰스 1세가 처형되었고, 오웬은 교회 정치관이 독립파의 경향을 띠고 있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국목(國牧)이 되었다. 1650년에 오웬은 크롬웰의 국목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원정대에 동행하여 청교도 혁명에 앞장섰다. 1651년에 그는 옥스퍼드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수석 목사가 되었다. 1652년에는 크롬웰이 옥스퍼드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자, 크롬웰은 오웬을 부총장으로 임명했다. 1650년대는 오웬의 전성기였다. 그는 옥스퍼드를 청교도의 요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1653년 옥스퍼드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654년에는 영국 의회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오웬은 당대의 모든 사역자들 중에서 공적인 국가 행사에 가장 빈번하게 초청받은 설교자였지만, 1657년에는 크롬웰에게 왕권을 수여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문제가 되어 부총장직에서 물러났다. 1658년 9월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했고, 회중주의자들의 선언인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이 발표되었다. 크롬웰이 죽고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무능하여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제는 왕당파와 장로교파가 왕정을 복고하기 위해 연합했다.4)




  1660년에는 왕정복고로 돌아온 찰스 2세(1660-1685)는 장로교를 국교로 삼겠다던 당초의 약속과 달리 국교회 정책을 폈다. 이에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극심한 박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1660년 이후 오웬은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된 쓰라린 박해를 견디며 회중교회파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1662년에는 통일령으로 이천 명 가까운 청교도 목사들이 영국 국교회에서 축출되었다.


  그 후 오웬은 비국교도로서 ‘제1 비밀집회 금지법’(First Conventicle Act, 1664)5), ‘5마일법’(1665) 등의 박해를 견디며 런던의 한 작은 독립파 회중 교회 목사로 섬겼다. 1673년에는 ‘제1 심사법’(First Test Act)이 의회를 통과하여 비국교도들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었다. 1673년에는 조지프 카릴이 죽자 그의 교회가 오웬을 청빙했다. 오웬이 사역하던 교회가 작았기 때문에 두 교회를 합쳐서 오웬이 죽을 때까지 십 년 동안 사역했다.


  오웬은 목회 활동 외에도 집필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저술한 대표적 작품이 『성령론』(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1674)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비중 있는 신학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그가 평생 출판한 책은 80여 권에 달한다.


  오웬은 1683년 8월 24일,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오로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는 일에 그의 온 힘을 다 바쳤다. 그는 죽기 이틀 전 마지막 편지를 구술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내 영혼이 사랑한 그분, 아니 내 모든 위로의 온전한 근원이시며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신 그분께로 갑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강한 통증으로 인하여 여행길이 매우 지루하고 피곤합니다. …… 나는 교회라는 배를 폭풍 속에 두고 떠납니다.”6)


  패커 박사는 오웬을 “청교도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다루시는 방법을 성경으로부터 설명함에 있어서 그 견실함, 심오함, 방대함, 위엄 등에 있어서 오웬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7) 패커는 개혁주의 3대 신학자로 장 칼뱅,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를 꼽았다. 오웬의 다양한 저술들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영적인 깊이를 가진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철저한 경건에서 나온 것이다. 


  오웬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론』(Meditations and Discourses on the Glory of Christ, 1684) 본문 첫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여기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서는 장래 직접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8) 오웬은 그 누구보다 성령의 조명에 대해 강조했다.









  1) Owen, A Review of the True Nature of Schism, in WJO, 13, 224.



 2) Robert W. Oliver, "John Owen - his life and times," in John Owen: The Man and His Theology, ed. Robert W. Oliver (Phillipsburg, New Jersey: P&R Publishing Company, 2002), 12.



  3) Andrew Thomson, Life of Dr Owen, in WJO, 1, xxx~xxxi. 



  4) 독립파의 경향을 띠고 있었던 크롬웰에 의해 창안된 “신형” 군대에는 독립파들이 압도적인 세력으로 나타났다. 1648년 12월 6일 ‘교만의 숙청’(Pride's Purge)은 의회에서 장로교파 회원을 내쫓고 잔여 의회’(Rump Parliament)를 남겨 놓았다. 이것이 왕당파와 장로교파가 연합한 배경이 되었다.



  5) 기도서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에 같은 가족 식구가 아닌 다섯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하는 경우에 벌금, 감금, 추방 등의 형벌이 가해졌다.



  6) Part of John Owen's last surviving letter, dictated to Charles Fleetwood on 22 August 1683.



  7) Packer, Among God's Giants, 107. 



  8) Owen, Meditation and Discourses on the Glory of Christ, in WJO, 1, 288.






정도현 감사합니다! ^^ [ 2013/11/11 ]